신분차별 없는 교육기회의 개방, 의무교육의 실시 등 민간인이나 학회 차원에서의
근대적 학교교육의 요구가 쏟아져 나왔고 무엇보다도 초등교육의 실시가 우선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5년 7월 칙령 145호 전문 29조로 구성된소학교령을 반포하였다. (중략)
이에 서울에 9개소 소학교 지방에는 관찰부 소재지 즉 수원, 공주, 충주, 광주, 전주, 진주,
대구, 춘천, 평양, 영변, 해주, 함흥, 경성에 공립 심상소학교가 1개교씩 설립되었고 1986년 학부의 지정지로서
개성, 강화, 인천, 부산, 원산, 경흥, 제주, 양주, 파주, 순천, 남원, 의주, 강계, 원주 등지에 공립소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소학교의 확산과 보급성과는 정부의 학생모집광고나 취학독려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바와 같지 않았고 학교시설이 보잘 것 없고 자격이 있는 교사가 부족했다.
(중략)
1900년 8월 발표에 의하면 관립소학교 고등과 졸업생이 15인, 심상과 졸업생이 55인이었다.
관립 소학교 심상과 졸업생수를 당시 한성 인구의 비율과 비교하면 0.05%, 0.03%,0.03%이다.
비록 중도 퇴학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졸업생의 숫자에서 짐작되듯이 취학률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학교 교육의 부진은 초등교육 단계의 국민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소학교 운영은 한성에 세워진 일부 소학교를 제외하고 지방의 공립소학교는 재정 자립도가
영세하여 운영하기가 어려운 지역이 많았다.
대한제국의 학부예산안을 보면 1897년 최저액인 76,778원에서 1905년 218,756원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나 교육예산이 정부 총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대로 매우 적었다.
(이시기 늘어나는 예산은 백동화 남발로 말미암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해야 합니다.)
특히 관립소학교비는 1899년 이후 급속히 감소하였는데 이는 새로 설립된 중학교비와 의학교비를
지원하는 데에서 생겨난 손실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다가 1905년 거의 2.5배 이상 늘어난 것은 당시의 정부예산과 교육재정이 전체적으로
늘어난 탓이기도 하지만 통감부가 식민이데올로기를 보급하기 위한 보통교육 실시의 기반을 조성해
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고, 대한제국의 교육보급 의지와는 무관했다.
(참고)
이 시기 교육보급을 주장했던 명사로는 유길준이 있는데 유길준은 프로이센의 학제를 소개하며
이를 도입하고자 신문에 소개하기도 하고, 정부에 탄원하기도 하였다.
프로이센의 학제는 각지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학령아동으로 하여금 교육을 받게 한다.
위원을 세워 그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부형은 자제를 취학시켜 매 7일에 도회지에서는
동화 75문 향촌에서는 7문반의 월사금을 내개한다. 부유한 자는 3개월에 1,350문을 내게 하여
빈곤자의 비용을 모두 면제케 한다. 2인 이상의 자제를 취학하게 하면 그 반을 면제하게 하고 해
당 지역민에게 징수하여 그 비용을 면제케 한다는 것이었다.
딱히 초등교육분야에도 대한제국의 근대화 가시적 성과나 노력 의지가 보이지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