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기사를 보면서 궁금해지는 것은
1.당시 에도정부는 수시로 흉작때문에 쌀이없어 굶은 농민들의 반란이 있었는데도
일본측은 조선은 오키나와나 훗카이도같은 일본의 사실상의 식민지에서 본국에 인사하러 오는거라고 하면서도
조선통신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전국 쌀 생산량은 2580만 석안팍일때 320만석을 사용했는지..
(물론 조선통신사들 보단 몇배로 따라붙은 대마도넘들이 날름먹은거같기도 하지만..)
2.병자호란전 대청제국황제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도 절을 안하고 꼿꼿했던 조선사신들이
일본천황도 아닌 일개 장군 급 에게 머리만 숙였는지 절을 숙였는지...궁금해지네요
3화. 한반도에서 받은 것을 부정하는 일본
김종성|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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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측의 초청을 받고 떠난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부산과 대마도(쓰시마)를 거쳐 교토 혹은 에도(도쿄)까지 이동했다. 이들은 보통 몇 백 명으로 구성됐다. 인조 임금 때인 1636년에는 579명이고, 효종 임금 때인 1655년에는 488명이었다.
이들이 조선·일본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를 지나는 순간, 사절단의 규모는 확 불어났다. 대마도인들로 구성된 수행단이 통신사 사절단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1682년에는 대마도 수행원들이 1760명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보다 대마도 수행단이 훨씬 더 많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절단이었다. 양쪽을 다 합치면 전체 규모가 2천 명을 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 대규모 행렬의 이동 경비는 전적으로 일본 측이 부담했다. 일본 무신정권인 도쿠가와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지상 최고'의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 도로나 교량을 정비 혹은 신설하고, 중간중간에 휴게소나 간이 화장실을 마련했다.
막부는 사절단이 육로로 이동할 때는 말들을 대령했다. 말들이 아프거나 다칠 경우에 대비해서 비슷한 숫자의 말을 '스페어'로 준비해뒀다.
통신사 행렬이 중간에 선박을 이용하게 될 경우에는, 선박들을 호위할 배들을 따로 준비했다. 6척의 조선 선박과 50척의 대마도 선박을 942척의 일본 선박이 호위한 적도 있다.
통신사 행렬이 육로나 해로가 아닌 강을 통해 이동할 경우에도 많은 비용이 소모됐다. 이런 경우에는 사전에 지역민들을 동원해서 강바닥을 준설해두었다. 한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준설 작업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배를 끌어당겨야 할 때도 있었다. 강 양쪽에서 몇 백 혹은 몇 천 명이 통신사 선박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일에 수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 자체가 다 돈이었다.
통신사 행렬이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자기 지역에 체류하는 것은 훨씬 더 난감한 일이었다. 최상의 요리와 숙소와 여흥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용을 사전에 준비할 목적으로,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에서는 1년 전부터 주민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이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이로 인해 농민반란이 벌어진 사례가 있었을 정도다. 2천 명이 넘는 인원이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6개월 내지 1년간 체류했으니, 통신사가 한 번 방문할 때마다 일본 전체가 홍역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옥스퍼드대학 동양학연구소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통신사 접대비용은 일본 국가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만한 것이었다.
일례로, 1682년에 긴키 지역에서 통신사 접대에 투입된 비용은 쌀 320만 석 정도였다.
17년 뒤인 1697년에 일본의 전국 쌀 생산량은 2580만 석이었다. 통신사 행렬이 얼마나 대단한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재정이 휘청거렸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된 18세기 후반에는 "이렇게까지 조선을 접대해야 하느냐?"는 불평이 막부 내부에서 나왔다. 이 정도로 통신사의 방문은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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