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허무하게 떼워버린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x치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미사여구일 뿐
게임을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사람들에겐 일관적인 모습이 있다.
자신들의 기억에 스토리가 깊이있거나 연출이 영화적인 게임의 예시를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게임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인 'Play'를 간과한다.
영화는 '스토리텔링'이 필수요소다. 하지만 게임의 필수요소는 'Play'다.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로 게임을 예술의 범주에 집어넣으려는 사람들은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이 존재하지 않고 'Play'만이 존재하는 게임들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레이싱게임, 스포츠게임, 카드게임, 퍼즐게임, 보드게임, 커뮤니티 게임 등이 있다.
공교롭게도 현 시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게임들이라면 단연 Wii 게임들을 꼽을 수 있다.
위스포츠, 처음 만나는 위, 위핏같은 게임들이다. 최근엔 저스트댄스가 인기몰이 중이다.
그것들은 스토리텔링이나 영화적 연출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Play만이 존재한다.
그럼 'Play'만으로도 게임을 과연 예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까?
"이 게임의 시스템은 예술이다"
"이 게임의 장애물은 예술이다"
"이 게임의 적들의 공격패턴은 예술이다"
"이 게임의 덱은 예술이다"
"이 게임의 수(手)는 예술이다"
대체 예술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위의 표현들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위의 요소들은 예술(藝術)이 아니라 산술(算術)이기 때문이다.
0과 1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산술이다.
물론, 습관적으로 아무 것에나 '예술'이란 표현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듣지 않겠다.
현실세계에서의 게임에 대한 인식은 어떤 것일까?
당연히 가장 높은 비율로 '시간 떼우기'를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Play의 지배를 받는다. 게임은 게이머의 컨트롤을 통해 Play된다.
게이머의 컨트롤이 이뤄지지 않는 동안엔, 게임은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게이머의 컨트롤이 이뤄지지 않는 동안엔, '게임'으로서의 시간떼우기가 아닌
'영화'로서의 시간떼우기다.
더러 게임을 클랜원들과의 '친목의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Community다. 사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그들은 게임속에서 함께 Community를 하며 동시에 Play를 한다.
퍼즐이나 카드게임, 바둑게임 등을 하면서 자신의 기지를 시험해보는,
'지적유희'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Play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게임을 예술이라 주장하는 인간들은 오덕들밖에 없다.
오덕들은 게임에 자신을 인생을 쏟아붓는 시간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보상도 받아야 할 것이다.
그 보상방법이 바로 게임에 대해 스스로 높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여,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게임을 '예술'범주에 올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특히 일빠게이머들이 게임을 예술로 보는 경향이 강한 이유는 '혼자하는 게임'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온라인게이머들은 비록 게임으로 시간을 죽여버렸다 한들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Community해오며 쌓은 인연과 인간관계의 경험을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혼자하는 게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일빠게이머들은
게임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는 것 외에는, 정말로 자신의 시간죽이기를 위안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게임을 예술로 평가하려는 그 동안에도 Play를 하고 있으며
Play만이 존재하는 위스포츠같은 게임들의 예술성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다문다.
그들은 애초에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로 예술을 정의했기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깊이있는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이 존재하는 게임만이라도
예술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오덕들이 게임을 예술이라 부르기 위해 필요로하는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를 위해선
최소 50억 이상의 자본과 수 십 명의 프로그래머가 필요하다.
촬영자와 배우, 8mm 필름과 캠코더만 있으면 영화적 연출을 흉내낼 수 있는 영화와는
상업적 종속도의 차이가 매우 크다.
상업적 종속도가 높다는 것은, 게임 속의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이
금전적 회수가 충분히 이뤄질 가능성이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게임이 판매량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도 의미한다.
"많이 팔리는 게임이 좋은 게임이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2007년 작품인 <바이오쇼크>의 총 지휘자 켄 레빈(Ken Levin)이 했던 말이다.
가장 예술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게임을 만들어 낸 사람이 상업성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에서 판매량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결국 Play다.
엄청난 브랜드밸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바에야
Play가 허접하거나 괴상한 게임이 잘 팔려온 역사는 없다.
하지만 Play를 위해선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을 희생해야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전투가 어울리는 세계관, 모험이 어울리는 세계관을 구성해야 하며
걸출한 최종보스를 만들기 위해선 그 최종보스 등장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스토리로 제약이 따른다.
도중에 개발자가 원하는 시점으로 연출하고 싶어도, Play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자제해야되는 경우도 생기고
주인공을 닭 한마리 잡을 힘도 없는 연약한 여성으로 만들고 싶어도, 그것은 Play를 제약한다.
결국 텔링과 연출의 구성이 '흥행할만한 Play'를 초점으로 정형화됨에 따라
점점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예술엔 자고로 정형화란게 없었다.
게임 속 텔링과 연출의 정형화에서 탈피하여 맘껏 스토리텔링과 영화적 연출을 지향했던 어드벤처 장르는
결국 자극성 없는 Play로 인해 장르 자체가 좆망의 길에 이르렀다.
오덕들은 어드벤처를 무슨 신의 장르인마냥 떠받들면서
FPS같은 강력한 자극을 주는 Play를 인스턴트 게임이라고 비난하며 고고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 시장에서 잘 나가는 것들은 Play에 있어 새로운 경험과 자극을 주는 것들이다.
예술찾는 오덕들은 자위를 하며 씁쓸히 묻혀갈 뿐이다.
결국 Play를 버리지 않는 이상 게임은 영원히 예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Play를 버리면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엘리티즘에 절을 대로 절은 역겨운 오타쿠들에게의 일침.
이글 쓴 사람. 진정으로 멋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