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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과 시바스 리갈, 어느 여대생의 글
게시물ID : sisa_1528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드립력
추천 : 16/3
조회수 : 220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12/23 23:24:34
이 글을 정치를 배운다는 심정으로 읽어 주십시오.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유익한 글입니다.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종신 독재자가 시바스 리갈을 마십니까?"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가 정승일 박사와 나눈 대화편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한때 '궁정동 술'이라 불렸던 이 양주에 대해 "박정희가 암살당할 때 마셨다고 해서 유명해져 엄청나게 좋은 술인 줄 알았는데, 영국에 가 보니 가장 싼 술"이더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부터 솔선수범해 가면서 부유층들로 하여금 외제와 사치품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장 교수는 박 대통령이 경제 발전에 성공한 요소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 그가 시장을 이용했다는 겁니다. 시장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는 거죠. 둘째, 그가 자본가들의 투자를 통제했을 뿐더러 심지어 이들의 소비까지 규제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이 술 얘기가 등장합니다.

박정희의 이런 면모는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이 전한 고건 전 총리의 회고담에도 등장합니다. 시바스 리갈과 함께.

 『朴대통령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수석들을 자주 부르셨어요. 일주일에 한 
번 꼴이 더 됐던것 같아. 陸英修 여사 돌아가시고 나서 적적하신 거지. 나오는 술은 딱 두 가지예요. 한 번 막걸리가 나오면, 다음에는 양주야. 朴대통령은 막걸리에 맥주를 탄 「비탁」을 좋아하셨어요. 聞慶에서 국민학교 교사하던 시절 모심기를 하면서 막걸리 한 말에 「기린 비어」 한 병을 섞은 걸 먹어봤는데, 그 맛을 못 잊으신 거야. 양주는 궁정동 만찬 술상에 올라서 유명해진 「시바스 리갈」이 나왔어요』

조금 더 인용해 보죠. 
 
 궁정동 安家(안가)에서 朴대통령이 金載圭(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시해되기 며칠 전에도 수석들과의 저녁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朴대통령께서 경호원을 부르더니 「내 침대 머리 맡에 양주가 한 병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해요. 경호원이 가져왔는데 바로 이 「로얄 살루트」야. 朴대통령이 혼자 좋은 술을 마셨다는 게 쑥스러우셨는지, 「朴浚圭(박준규·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가 미국 갔다 오면서 한 병 선물로 사왔어. 잠 안 올 때 한 잔씩 아껴 먹었어」라고 해요. 병을 들어보니 3분의 2쯤이 남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 10명쯤이 있었는데 한 잔씩 돌았어요. 처음 먹어봤는데 술 맛이 기가 막혀. 다들 「한 잔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군침을 삼켰어요. 그런데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남은 술은 침실에 갖다 두겠습니다」하고, 술병을 빼앗아 경호원에게 건네줬어요. 朴대통령이 「어이」 하고 경호원을 한 번 부르기만 하고, 「술병 여기에 놔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얼마나 야속하던지 말이야(웃음)』

박정희의 술 자리가 이렇게 소탈하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이춘재 <한겨레21> 기자에 따르면 그는 유신 말기 여성을 동반한 술자리를 자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석자 없이 본인만 참석하는 이른바 '소행사'에도 '대통령의 여인들'이 불려갔던 것 같습니다. 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따르면 이렇게 불려다닌 여인들이 100명쯤 됩니다.

김재규의 명으로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정 의전과장은 당시 공판 과정에서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힙니다. 항소심 마지막 공판 진술에서 그는 “각하께서 평균 한달에 열번 (궁정동 안가에) 나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장하준 교수와 정승일 박사가 박정희에 편향돼 있는 학자들은 아닙니다. 이 책을 엮은 이종태 전 <말>지 편집장은 박정희의 개발 독재와 관련해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런 시각에 저도 공감합니다.

박정희라는 인물이 꼭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 독재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경제 개발이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박정희의 경제 개발과 같은 적극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방식의 경제 개발이. 그 과정에서의 착취와 저임금 구조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했으면 좋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능한지 모르겠다.








어느 여대생의 글


어느 여대생의 글 



경제학을 연구하는 어느 여대생의 글을 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장래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젊은 20대 여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 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 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 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 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 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 말로 한국을 망친 창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 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 이었으므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 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 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이라는 단기간 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 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 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 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 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출처] 어느 여대생의 글...박정희의 역할|작성자 바보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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