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능력과 남다른 포부도 지녔지만 운이 따라주진 않은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부여 창)은 매우 강경한 성격으로 생각됩니다. 관산성 전투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 것을 보면 말입니다[1]. 그리고 그런 성격과 비례하여 무력 또한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기록을 보면 백합야라는 곳에서 고구려군과 백제군이 싸운 일이 있었는데 위덕왕(부여 창)이 직접 고구려군과 교전하여 싸운 내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참고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겨울 10월, 경인 초하루 기유(20일), 백제의 왕자 여창은 나라 안의 군사 전부를 일으켜 고구려에 가서 백합야에 요새를 쌓고 병사와 침식을 같이 하였다. 저녁에 머릴 바라보니, 넓고 기름진 언덕과 평평한 들에 인적은 드물고 개짖는 소리도 끊어졌다. 그런데 홀연히 극히 짧은 사이에, 북과 피리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창은 크게 놀라 북을 치며 대응하였다. 밤을 세워 굳게 지켰다. 새벽에 일어나 광야를 보니 푸른 산을 덮은 듯이 깃발이 가득하였다. 밝을 무렵에 머리부분에 갑옷을 입은 자가 1기, 징을 든 자가 2기, 범꼬리를 머리에 꽂은 자가 2기, 합해서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나와서
"부하들이 말하기를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왔다'라고 하였다. 마중하여 예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컨데 나와 예로써 응답하는 사람의 성명, 나이, 지위를 속히 말하시오"
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대답하였다
"성은 (고구려 왕실과 같은) 동성이고, 지위는 간솔, 나이는 29세"라고 말하였다. (이 부분은 어째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의 쿨가이 관우를 생각나게 하더군요)
다음 백제측에서 물은즉. 전의 법도에 따라 대답하였다. 그래서 깃발을 세우고 교전하였다. 백제(여창)는 창으로 고구려의 용사를 말에서 찔려 내려 목을 베었다. 머리를 창끝에 꽂아들고 돌아와서 군사들에 보였다. 고구려의 장병은 격노하였다. 이 때 백제의 환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또한 부장들이 북을 쳐 격렬하게 싸워 고구려의 왕을 동성산 위로 퇴각시켰다.」
백합야 전투는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고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전투 기록인데. 아마 확인된 기록들 중에서는 한국사 통틀어서 이성계 등과 함께 최고 수준의 무예를 지닌 왕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리고 태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침식을 같이했다는 기록을 보아하면 매우 모범적인 지휘관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물론 같이 지내는 병사들의 마음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 일본서기 흠명천황 기록에 따르면 「여창이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노신들이 간하여 "하늘이 아직 우리를 돕지 아니합니다.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노신들이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과 한편이다. 무슨 두려울 것이 있는가"라고 대답하였다.(중략)」라고 나옵니다.
출처 |
일본서기 권 제19 흠명천황 14년 10월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