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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 주체 세력에 대하여 - 백제 건국세력은 연나부?
게시물ID : history_230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먕갱
추천 : 11
조회수 : 1750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5/09/20 00: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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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건국세력에 대해서 재밌는분석인거 같습니다

요즘 네이버 카페 눈팅하는 재미로 사는데 역시 천외천의 고수는 어디에나 있다는걸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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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중에서 그 건국주체 세력이 가장 불분명한 나라 역시 백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2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가는 무렵에 남하한 고구려계 유민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200년경부터 축조가 시작되는 석촌동의 기단식 적석총 떄문인데, 이는 고구려가 기원후부터 조영하기 시작한 양식으로 그 이전에 남하한 영서의 말갈들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백제가 2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가는 무렵에 갑자기 석촌동 적석총을 조영하기 시작하는점을 상정하고, 동시에 고구려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기에 백제로 남하하게 되었는지 두가지 사건을 곰씹어 볼 수 있습니다.

 

 12년(190) 가을 9월에 서울에 눈이 6척이나 내렸다.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았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세력을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며 남의 자녀와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통해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97) … 연우가 3일간 문을 닫고 있으니, 나라 사람들도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보고 알리기를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자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모의하고 즉위하여 천륜의 의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하러 왔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병사 3만을 빌려 주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할 수 있게 해주소서.” 하였다. 공손탁이 그에 따랐다. …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건안(建安연간(A.D.196~219; 고구려 고국천왕 18~산상왕 23) 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발기(拔奇)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연노부(涓奴部)의 대가(大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公孫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유역에 옮겨 살았다지난 날 항복했던 호족(胡族)도 이이모(伊夷模)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발기(拔奇)는 드디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고그 아들은 고구려(高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지금 고추가(古雛加) 교위(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그 뒤에 다시 현토(玄菟)를 공격하므로 현토군(玄菟郡)과 요동군(遼東郡)이 힘을 합쳐 고구려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190년의 사건과 197년의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할 차이점은 반란주도세력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먼저 190년의 사건은 왕후의 친척으로 '4연나'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위의 椽那(연나)는 절노부에 해당하므로, 대대로 고구려의 왕비족 역할을 했다는 부족입니다. 이에 반해 197년의 부족은 涓奴(연노)라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전왕족이던 비류부에 해당합니다. 한가지 주지할점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소노부에서 아직도 전 왕족으로서

 

 고구려에서는 관직을 설치할 적에 대로(對盧)가 있으면 패자(沛者)를 두지 않고패자(沛者)가 있으면 대로(對盧)를 두지 않는다()이 종족(宗族)으로서 대가(大加)인 자는 모두 고추가(古雛加)로 불리워진다연노부(涓奴部)는 본래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適統)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古雛加)의 칭호를 얻었으며자체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게 따로 제사지낸다. 절노부(絶奴部)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大人)은 고추가(古雛加)의 칭호를 더하였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자체적인 종묘와 영성, 사직을 모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싣고 있습니다. 삼국지에 실린 고구려에 대한 정보는 대체적으로 244년, 관구검의 환도성 공함때에 입수된것으로 생각되므로 비류부가 왕위에서 밀려난지 300여년이 지난 동천왕대까지 그 독립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한번 우리가 생각해볼점은 백제의 건국세력이 위의 두 세력중 고구려의 어느집단을 표방하고 있느냐 입니다. 백제의 건국 설화는 여러종류가 남아있는데,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는 여러분들이 모두 잘 아시고 계실테니 중국측 기록에 나오는 구태설화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백제(百濟)의 선대(先代)는 고구려(高句麗)에서 나왔다그 나라 왕의 한 시비(侍婢)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어 왕()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달걀같이 생긴 물건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고 하자그냥 놓아 주었다뒤에 드디어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이 신령스럽게 여겨 기르도록 명하고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장성하자 고구려왕(高句麗王)이 시기를 하므로동명(東明)은 두려워하여 도망가서 엄수(淹水)에 이르렀는데부여(夫餘사람들이 그를 모두 받들었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으니매우 어질고 신의(信義)가 두터웠다그가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의 요동태수(遼東太守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東夷중에서 강국(强國)이 되었다당초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불렀다이때부터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中國)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전사(前史)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 수서, 동이열전

 

 중국측 기록의 백제전에 나오는 사실들은 백제 멸망후 당나라에 끌려간 백제인들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의자왕의 계보인 후기 백제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시조격 인물은 동명과 구태가 있는데, 여기서 동명은 고구려의 추모왕일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온조설화와 비류설화에서 각각 동명은 온조의 조상으로, 구태는 비류의 조상으로 나오고 있으니, 후기의 백제왕실은 내부 체제의 결속을 위해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를 통합시킨게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주지할점은 위 기록에 나오는 구태라는 인물이 온조설화에는 나오지 않고 비류설화에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비류설화에는 구태와 소서노 사이에 본디 온조와 비류라는 자식이 있었고, 우태 사후 추모왕이 새로 남하하여 고구려에 오자 재혼하였다고 하니, 비류설화야말로 후기 백제왕실이 가지고있던 전승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류부=소노부=연나부 이므로 위의 197년에 발기와 함께 연나부 3만여구의 민호가 이탈했다는 기록은 주목할만한 사건입니다. 후한서 동이전에 고구려의 인구가 3만호라고 하였으니 비류부에서 3만구가 이탈하였다면 거의 부(部)하나가 통째로 고구려에서 이탈한것이나 다름없는 대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3만여구의 민호가 어디로 사라졌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주목할만한 기사가 있습니다.

 

 후한(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말기에는 한()과 예()가 강성하여 한()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연간(A.D.196~220; 백제 초고왕 31~구수왕 7)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과 예()를 정벌하자(()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이 뒤에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에는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왜와 한이 대방에 복속되었다고 싣고 있습니다. 이는 건안연간의 군사적 활동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한(韓)의 일부가 대방군에 복속되었다는건데 공손강이 이런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의 유민들뿐만 아니라 3만여구나 되는 고구려 유민들의 유입이라는 군사적 뒷배경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수서 백제열전에서 백제 시조 구태가 "그가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라 하고 있는 이유 역시 공손강때 새로 복속된 땅에 백제 유민을 안치시켰고, 그 유민들의 지도세력인 백제 왕가는 공손씨 세력과 협력 관계를 맺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이는 역시 수서 백제열전에 기록된, 공손강의 누이동생과 구태가 혼인을 맺었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대방왕과 책계왕이 사돈관계였다고 나오는데, 이런 협력관계는 책계왕떄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86년)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이에 앞서 왕이 대방 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이를 보아할때 책계왕 초기까지는 백제와 한군현은 협력 관계였고, 백제는 목지국과 한군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그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생각해보아야 할점은 많지만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고구려의 왕위다툼때에 발기와 함꼐 탈주한 고구려의 3만 민호가 공손강의 한-예 정벌때에 한수유역에 정착하여 대방군과 협력, 발전해 나갔던 것으로 주장해 봅니다.



3세기_초_z1627.jpg
※ 지도의 속말갈을 반도말갈로 정정합니다. (오타;;)

[출처] 신 한성 백제사 연대기 2 - 백제 건국 주체 세력에 대하여 (『역개루』대한민국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라이트온

출처 http://cafe.naver.com/historygall/13056 - 네이버 역개루의 '라이트온'님의 글 '신 한성 백제사 연대기2-백제 건국 주체 세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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