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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순으로 간략하게 살펴 보는 여진 정벌 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230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0
조회수 : 101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9/19 19: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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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5년 문종 9년 천리장성이 완공됩니다.
 
1085년 선종 2년 여진 완안부 영가가 추장에 오릅니다. 후에 금나라에서 목종으로 추존 하는 인물이지요.
 
1102년 숙종 7년 완안부는 고려와 통교를 맺는데, 이때 완안부의 세력은 간도에서 갈라전 즉 함경도 일대로 확장합니다.
 
1103년 숙종 8년 완안부 우야소 이후 금나라에서 강종으로 추존되는 인물이 석전환으로 하여금 갈라전 일대를 정벌케 합니다.
 
1104년 1월 완안부의 정벌에 따라 여진인 1,700여명과 14명의 추장들이 고려로 귀순을 하는데 이에 완안부 우야소는 사신을 보내어 이 들을 돌려 받고자 하나 고려는 이 들의 입국을 거부하는 한편 단련사 14인을 구금하는 하고 임간을 관동북면 행영 평마사로 임명 상황에 대비토록 합니다.
 
같은 해 2월 임간은 성 밖에서 일전을 시도하나 대패를 합니다, 적들은 천리장성을 넘어 장주를 함락시키고 정주 선덕관성을 공격, 정주 일대를 불사르고 약탈을 일삼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되기를 이 때의 적 장수를 추장 연개의 부하 지훈이라 하나 석전환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같은해 3월 전황을 돌리기 위해 윤관을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 지원군을 보내나 전과는 적 30명 사살 아군 절반 이상 사망이라는 참담한 패배를 합니다, 고려는 늘 아래라 얕보던 이 들과 어쩔수 없이 화친을 맺고 구금한 단련사들과 귀부한 여진인들을 돌려보냅니다. 이후 숙종은 매우 대노하여 신령의 신묘한 힘이 도와 저 들을 정벌토록 해주신다면 저 들의 땅 위에 절을 세워 섬기겠다고 합니다.
 
1104년 12월 적들은 기병이나 아군은 보병이라 질수밖에 없었다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별무반을 설치합니다.
 
고려사 등의 기록을 보면 문 무 산관이서로부터 장사하는 사람, 종 및 주 부 군 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을 가진 자를 신기(神騎)로 삼는 한편 나이 20 이상의 남자로 과거 응시자가 아니며 말 없는 자를 신보(神步)로 삼고 승도 즉 스님들을 데려다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아 병력을 충원하는 한편 이 외에 궁병이나 노병 등을 끌어다 넣기도 했습니다.
 
1106년 1월 예종이 신기군을 사열합니다.
 
같은 해 11월 윤관이 오연충과 함께 신기군 및 신보군을 사열합니다.
 
1107년 4월 국경에서 여진족과의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예종이 숙종의 맹세문을 공개하고 출정식을 거행합니다.
 
같은해 10월 귀부자 들을 돌려주겠다 하여 완안부의 사신을 초청합니다.
 
같은해 11월 19일 예종이 서경을 향해 출발하고 24일에 도착합니다.
 
같은해 12월 1일 서경 위봉루 조진전에서 윤관 오연충에게 부월을 하사 4로군이 출진합니다.
 
이때 병력은 본군 윤관 53,000명 중군 김한충 36,700명 좌군 문관 33,900명 우군 김덕진 43,800명에 더하여 수군 2,600명을 포함하여 총 병력 17만이라는 고려 역사상 유래 없는 대군입니다.
 
같은해 12월 13일 함경남도 정평군에 도착 일단 대기합니다, 이 날 완안부의 사신 일행과 갈라전 즉 함경도 일대의 추장 등 400여명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다 모두 죽여버립니다,
 
이때까지 우야소 즉 오야속은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해 12월 14일 여진의 영역으로 진입, 대내파지촌에 도착하나 여진인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축만 들판에 넘치고 있습니다.
 
같은 날 윤관의 본군이 무내니촌과 동음성에서 여진의 촌민들의 저항에 직면하나 수월하게 진압, 여진인들은 패주합니다.
 
같은해 12월 15일 좌군이 석성에 도착 여진인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나 거부 당하여 공성전을 시작합니다, 이때 척준경이 적진으로 돌격 추장 2~3명을 참살한 것을 시작으로 전 군이 돌격하여 성안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버립니다.
 
 
12월 15일 부터 24일까지 고려의 전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윤관이 이끄는 본군 - 대내파지촌 등 37촌 정벌, 2,120명 사살,포로 500명 획득, 일부를 돌려 이위동을 공격함락시켜 1,200명을 사살
 
김한충의 중군 - 고사촌 등 35촌을 정벌, 380명 사살, 포로 230명 획득
 
문관의 좌군 - 심곤등 31촌을 정벌 950명 사살
 
김덕진의 우군 - 광탄등 32촌을 정벌, 290명 사살 포로 300명 획득
 
총 136개촌 정벌, 4,940명 사살 포로 1,030명 획득
 
상황을 인지한 오야속이 완안부로 돌아와 부족회의를 열지만 아골타를 제외한 모든 부족민들이 전쟁에 반대합니다.
 
 
같은해 12월 24일 여진족 추장 요을내가 부족민 3,200명을 이끌고 항복합니다, 함경북도 단주와 함경남도 단천 지역에 영주,웅주,복주,길주 등 4개 성을 축조하기 시작합니다.
 
1108년 1월 여진 완안부에서 알새를 주장으로 삼아 완안부의 각 부족에서 끌어모은 병력 2만여명을 10개 부대로 나누어 반격을 시작합니다,
 
이 때 선봉 아도한이 30명을 이끌고 타길성을 함락시키는 한편 고려 수군의 함선을 전소시켜버립니다.
 
같은 해 1월 윤관 오연충이 8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동중 적의 매복에 걸려 패퇴합니다.
 
10명만이 겨우 이 둘을 호위하고 있었던 가운데 척준경이 돌격 10여명을 참살하여 시간을 벌고 그 사이 구원군이 도착, 함께 분투하여 36명을 추가로 저승으로 편도 티켓을 끊어준 이후에야 포위망을 돌파 영주성으로 들어갈수 있었는데 이후 영주성이 2만명의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척준경은 결사대를 이끌고 돌격 적의 선봉을 꺾어놓습니다.
 
이 외에 여진 추장 가로환이 403명의 부족민을 이끌고 윤관의 군진에 투항하였고 여진 남녀 1,460명이 정벌군에 투항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4성이 완성되었습니다.
 
같은해 2월 11일 여진족 수만이 옹주성을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일전을 벌여 사살 90에 전리품 다수의 대승을 거두는 한편 야간을 틈타 척준경이 포위망을 돌파하고 지원군을 불러와 적을 크게 물리칩니다.
 
같은해 2월 27일 함주와 공험진에 추가로 2성이 완성됩니다.
 
공험진 비석을 세웠으며 윤관은 예종에게 정호를 각성에 배치 했다는 즉 군인 가정들의 이주가 완료되었다는 표문 올립니다, 이때 이주한 가정은 함주 1948호 영주 1238호 옹주 1436호 복주 632호 길주 680호 공험진 532호 등 총 6,500여호에 이릅니다.
 
같은해 3월 의주, 통태, 평윤에 3성이 완성됨으로써 총 9개 성이 축조가 끝났습니다.
 
같은해 3월 28일 영주성 밖에 여진인들이 진을 치자 출격하여 패퇴를 시키고 말 8필의 전리품을 얻는 한편 적 20명을 사살했습니다.
 
같은해 3월 29일 3월29일 윤관은 포로 346명,말 96필, 소300마리를 개경에 보내는 한편 총 68,000호의 남쪽의 백성들의 이주가 끝났다고 보고를 올립니다.
 
 
 
네 원정은 여기 까지 입니다, 이후는 아시다시피 화친을 하고 의주성, 공험진, 평융진을 제외한 모든 성을 돌려주게됩니다,
 
사실 이 원정은 참 재밌는게 9성을 돌려준것이 1109년이고 금이 건국된 시기가 1115년입니다, 불과 10년도 안되는 시기에 나라를 세울 만큼 국력을 모았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네 여진은 이미 결집하여 성장할데로 성장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고려는 그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원정의 실패 요인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애시당초 고려가 품었던 전략인 9성을 단단히 지키며 적의 주요한 길로를 차단한채 후방은 백성들로 하여금 개간하게 한다는 것인데 17만의 벙력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유지도 불가한 병력이었던 것을 감안할때 민병들은 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충의 개선식과 함께 귀환하여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정규군과 그 들의 가정, 그리고 다수의 백성들만 남아있던 것 같지만 아무튼 이 병력이 담당하기에는 동북 9성의 지역은 너무나 전술적으로 불리합니다.
 
지형은 험하나 사방으로 길이 뜷려 있어 교통이 편리한 탓에 백성들을 풀어놓고 요충지와 주요한 길목을 지킨다는 전략을 고수하기에는 공격하는 자들에게 매우 유리합니다, 그렇다고 고려의 장기인 각 성의 유기적인 연결이 용이한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여기는 여진의 땅입니다.말 그대로 저쪽은 AWACS 띄우고 전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더군다나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백성들이 얼마나 남아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경작지는 황량합니다, 거기다 정부에서 보기에도 여기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은 참 문제가 많은터라 1109년에 이르러서는 실상 대다수는 귀환한 상황일거라 판단되기에 민병과 관병의 비율이 거의 엇비슷 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껏해야 두배 남짓이겠지요.
 
거기다 1108년 기준으로 이주한 군호가 6,500여 호정도 되니 정규병은 고려 중기의 군반 세습을 고려할때 비슷한 숫자에서 7천여명 많게는 1만명까지 바라볼수 있을것입니다, 이는 용호군과 응양군 등 친위대를 제외한 고려 정규군의 1/4 정도 됩니다, 즉 더이상 병력을 올려보내는 것은 무리한 상황입니다.
 
참 이게 터놓고 말해서 힘들지요,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무리인 상황에 내몰린 것입니다, 수비하기는 불리하고 그렇다고 토지가 비옥한것도 아닌터라 큰 이득은 볼수가 없는 반면 투자는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게 또 고려의 재정 여건상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두서가 없었지만 그렇습니다, 애시당초 고려에 호의적이던 함경도 일대의 추장들을 몰살시켜 대화의 선을 끊은 것이나 남계의 백성들을 이주시킨 것에서 원주민의 완전한 말살 위에 새로운 깃발을 세우고자 했던 고려의 생각을 가늠할수 있었지만 상황은 달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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