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부파불교는 왕조와 합작하여 샤머니즘의 토대를 추행했다.
그러나 유교는 그리 지능적이지 않았다. 왕조와 긴밀하게 협조하긴 했으나, 유교는 무교에 관해서는 토대보다 그 교세를 죽이는 데 집중했다.
물론 무당을 잡아들이는 행위가 토대를 흔들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토대는 교리다. 미얀마의 왕조는 샤머니즘의 뼈대를 조정했으나, 유교는 이런 방식으로 무교에 권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무교가 유교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 더 물으면, 무교 안에서 여성성이 유교에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우선 짚고 넘어야 할 것이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종교적 상황을 숭유억불과 무교에 대한 탄압으로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
나도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양반가도 굿판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고, 전염병이 퍼질 때는 국가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한다.
원구제를 할 때는 종묘사직에 있는 조상신들에게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불교, 도교, 무교의 사제들을 불러 산천과 성황신들에게도 가뭄을 멈춰달라고 빌기도 했다.
국난을 넘기기 위해 그 나라의 모든 종교적 역량을 끌어 모을 때, 무교의 힘이 빠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상황이 있다고 해서 무교에 대한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의 억압을 무시할 수는 없다.
12세기 초, 고려의 유학자들로부터 이어지는 무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조선에 이어졌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무교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성과 부정을 연결시키는 관념은 아마 꽤 오래된 것 같지만,
계속된 조선 왕실의 물리적 탄압은 무교 속에서 여성의 지위를 현격하게 끌어내렸을 것이다.
당연히 유교 사회에서는 남자 아이의 출산을 기원하러 무당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지 않았을까?
자료는 없지만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단골의 믿음 체계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무교로서는 여성의 지위를 이전 시대보다 상당히 낮게 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말해주는 사례로 무교에는 사후결혼을 시켜주는 의례가 있다. 남성은 일찍 죽어도 유교 제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혼기가 찬 처녀의 죽음은 유교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사후결혼은 전적으로 여성의 필요에 의해 요청된다.
이런 상황에서 죽은 남성은 가부장 질서의 권력을 사후세계까지 이어가고,
여성은 그 권력에 기댐으로써 기려지지만, 죽어서도 부수적인 존재로 남는다.
이에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선 우리가 봤을 때는 물론 불평등한 질서겠지만,
당시의 맥락을 살펴봤을 때, 조선의 유교가 꼭 여성을 주변화한 주범이었는가?
혹은 여성이 아무런 지위를 가질 수 없었는가? 규방 문화를 일구지 않았는가?6
나의 반론은 이렇다. 규방 문화 좋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의 예술로 대표되는 우리의 규방 문화의 가치를 물론 무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규방 문화를 일군 여성이라고 해봤자, 소수의 양반 규수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양반가 여성은 일부였고, 그 당시 우리 사회의 대부분은 평민이나 천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 공동체 내에 스며든 주자가례에 의해 철저히 억압받았으며, 가정에 얽매여 독자적인 문화를 꽃 피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주자가례는 무교적 풍습을 축출함으로써, 여성이 보다 더 여성친화적인 종교와 멀어지게끔 했다.
뿐만 아니라, 무교에 대한 끈질긴 박해는 무교를 사회로부터 갈라놓기까지 했다.
무당의 서울 거주를 금지시킨 조처가 그 대표적인 예다.
무당이 떠나간 자리에는 주자가례가 스며듦으로써, 자연스럽게 유교적 관념을 무교에 반영시키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천민으로 전락한 무당의 위상이 그들의 신탁이나 굿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 마을에 정착하는 것마저 불안한 그들에게 신뢰성마저 앗아가는 것은 그들의 경제력을 크게 약화시켰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조선 말기에 들어, ‘조화에의 지향’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무교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장희빈의 악행 중,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를 빼놓을 수 없다. 왕실의 역사에서 그런 괴기스러운 저주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앉히려는 시도에서 자연물의 생명을 잔인한 방식으로 앗아가는 저주가 횡행했다.
동시대의 민중들의 생활에서도 저주의 풍습이 창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무교를 기반으로 한 동학 등의 민족 종교가 발생한 것으로부터 무교의 큰 의미를 찾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분명히 저주의 풍습에서 우리는 무당의 또 다른 타락을 보게 된다.
저주는 갈등이라는, 조화의 원칙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일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당시는 두 번의 호란과 삼정의 문란에 의해 난세라고 평가할만한 시기였다.
이런 궁핍한 시대 속에서 무당들에게도 탐욕이 기승을 부려 저주의 부적을 비싸게 받고 팔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신분도 낮고 경제력도 없는 무당들은 그런 식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무당의 사회적·경제적 전락이 무당들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신도 외의 모든 종교 탄압을 자행했다.
무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산의 국사당(國師堂) 이전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조선 왕조보다 지능적인 측면이 있었다.
무교를 탄압하는 한편, 미얀마의 불교 왕조가 행했듯이, 무교의 체계에 그들의 종교인 신도를 개입시켰다.
해방 후에도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한반도의 정부들은 무교를 탄압했다.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스의 말을 철저히 따르며, 다른 종교들과 함께 무교를 박멸했다.
남한에서 일어난 새마을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무교는 경제를 살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기며 민중과 무교를 분리시켰다.
이 와중에 일어난 무당의 위상 변화는 중요하다. 조선시대의 무당과 악사들은 모두 천민이었다.
그러나 무당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악사들보다 높았다. 그러나 일제가 물러난 뒤에 이 둘의 관계는 반전된다.
새마을운동의 거센 물결을 무당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악사들의 음악은 한민족의 얼이 담긴 음악으로 재평가되며, 정부와 학계의 간택을 받는다.
무당이 굿판에 빠질 수 없지만 악사 역시 빠질 수 없다.
높아진 악사의 지위는 원래 중요했던 역할을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그는 어느 굿판이나 참여할 수 있는 위치가 됐다.
심지어 굿판에 무당보다 늦게 도착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와 준 게 고마운 인간이 된 것이다.
그래도 행사비는 무당과 똑같이 받는다. 과감하게 말하면, 악사가 무당을 수탈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부터 내려 온, 무당과 악사가 결혼하는 전통도 심하게 변질된다.
조선시대 때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의 무당이 악사와 결혼하는 형국이었다.
근래에 들어 이는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첩을 두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지는 오래됐으나, 여러 무당을 첩으로 거느리는 악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축첩 현상이 지금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당의 지위는 전반적으로 후퇴한 것으로 해석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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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루시, “미얀마 샤머니즘의 개관과 연구 경향”, 『한국무속학 제 22집』, 2011.2.
황루시, “동남아시아지역 여성사제 연구”, 『비교민속학 45』, 2011.8.
종교학 수업 과제이긴 하나, 역사랑 관련이 있을까 싶어 올립니다.
비공과 질문 달게 받겠습니다.
출처 | 제 과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