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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핀은 새롭게 발견된 물질이며 의학적으로 훌륭한 약이라는 신념 아래 유럽과 미국의 부유층들은 소일거리로 모르핀을 즐겼다. 심지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모르핀의 위험이 경고되었을 때도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완벽하게 중독될 때까지 매일 주사를 맞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르핀 중독을 부추긴 또 다른 요인으로는 그것이 아편과 달리 어떤 사회적 불명예도 붙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 아편제나 아편 환약들보다 복용량이 훨씬 많다는 점도 있었다. 아편제 1온스는 약 1그레인(0.064그램)의 모르핀을 함유하기 때문에 하루에 2온스의 아편제를 먹는 중독자들조차 주사를 맞는 중독자보다는 훨씬 적은 양의 모르핀을 복용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모르핀 중독자의 경우에는 1일 10그레인 이상을 투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40그레인까지 투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모르핀 중독이 아편 중독에 비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르핀의 긍정적인 면 또한 엄청났다. 진통제로 사용된 모르핀은 19세기 수없이 발생한 지구 곳곳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을 구해냈다. 오죽했으면 군인들은 모르핀을 가리켜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모르핀 덕분에 부상당한 군인들은 마취된 상태에서 고통 없이 치료받을 수 있었고, 치료 후의 통증도 훨씬 줄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전투가 많아질수록 아편과 모르핀의 수요도 증가했으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남북전쟁 당시에 미국 내 양귀비의 주요 경작지는 버지니아, 테네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이었고, 아편은 북부연방과 남부연합의 양쪽에서 생산되었다. 모르핀이 진통제로 개량된 결과 아주 많은 수의 부상병들이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으며, 아편제 중독은 군대병 또는 군인의 병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아편은 양쪽 군대 모두에게 다량으로 복용되었으며, 군인들은 말라리아와 설사에 대비해 하루 기준치로 정해진 약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그리고 주사기가 흔해짐에 따라 모르핀 주사도 실시되었다. 1,000만 개 이상의 아편 환약들과 200만 온스(약 56톤)의 분말형 아편제들, 모르핀이 북부연방군에게 배급되었고 남부연합군에서도 비슷한 양이 투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북전쟁은 전쟁 이외에도 또 다른 나쁜 결과를 낳았다. 지속적인 아편 복용으로 인해 6만 3천명 이상의 군인들이 중독 증세를 보인 것이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중독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더구나 모르핀에 대한 편향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호레이스 데이는 1868년에 발행한 자신의 책 <아편 중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수년간의 사건들(남북전쟁)은 수많은 중독자를 만들어냈다. 전쟁터에서 불구가 되고 망가진 생존자들, 적의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병들고 불구가 된 군인들, 희망을 잃은 전사자의 아내와 어머니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사용하여 일시적으로나마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미국 군인들만 아편에 중독된 것은 아니었다. 크림전쟁에서 영국 군인들은 전쟁터의 끔찍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르핀을 주사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군인들 모두 알콜뿐만 아니라 모르핀으로 자신들의 슬픔을 달랬다.
출처 | 푸른 장미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