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큘러스VR이 지난 9월에 발표한 '크레센트 베이' 실물
지난 9월 19일, 가상현실 기기 제작사 오큘러스 VR이 개최한 행사 ‘오큘러스 커넥트’에서 ‘크레센트 베이(Crescent Bay)’가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초기 모델에서 조금 더 나아간 DK2를 발표한 지 약 7개월 만이죠.
DK2와 크레센트 베이의 가장 큰 차이는 포지셔널 트래킹의 범위입니다. 더불어 3D 사운드가 구현됐고, 헤드트래킹은 270도에서 360도까지 늘어났습니다. 즉, 고개를 어느 방향이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죠. 특히 트래킹 범위 내라면, 사용자가 걸어다니는 움직임도 인식합니다. 이 외에도 해상도와 격자감 해소 등 DK2보다 나아진 점이 많지만, 현재 제작된 물량이 부족한 탓에 국내에서는 시연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크레센트 베이가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그것도 단 하나만요. 오큘러스 프로토타입부터 DK1, DK2… 새로운 모델이 발표될때마다 꾸준히 체험해 봤으니, 크레센트 베이는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궁금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외신을 읽는 것보다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최고죠. 그래서 오큘러스VR 한국 지사로 출동했습니다.
구조 바뀐 오큘러스 체험실, 이유가 있었네
오큘러스VR 한국 지사 사무실에는 별도의 체험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무실을 방문하는 다양한 손님들이 가상현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죠. 오랜만에 방문한 탓인지 구조가 바뀌었더군요. 본래는 방 한가운데 원통형 기둥이 있고, 기둥에 설치된 DK2를 체험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둥이 사라지고, 벽면에 텔레비전과 크레센트 베이와 DK2가 위치하고 방 자체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크레센트 베이의 포지셔널 트래킹 범위 때문입니다. DK2가 극히 제한된 공간과 사용자의 움직임 정도를 인식했다면, 크레센트 베이는 5평 정도 너비의 방 안에서 하는 유저의 행동은 모두 잡아냅니다. 걸음걸이까지도요. DK2는 포지셔널 트래킹을 지원하나,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둘러보는 행동만 가능했는데, 크레센트 베이를 착용하면 훌훌 털고 일어나 방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 직접 걷고, 쪼그려 앉아보기까지 했습니다
밧줄에 묶였던 인질 신세에서 풀려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예쁘게 꾸며진 가상 공간 속을 걸어 다니며 갖은 소품을 건드려보고, 거울에 얼굴을 비춰볼 수도 있습니다. 다소곳하게 놓인 찻잔을 집어 들려고 손을 뻗고, 그 자리에 실제 찻잔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이 장소가 현실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는 수준입니다.
여기에 3D 사운드까지 더해지니 현장감은 DK2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대화됐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NPC에게 등을 돌리면 그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리고, 멀리 걸어가면 소리가 아득해지는 느낌마저 듭니다. 더불어 바닥에 쪼그려 앉거나 고개를 빼꼼 내밀고, 까치발을 들어 담 넘어를 내다보는 움직임까지 가상현실 속에서 모두 재현됩니다. 작은 행동도 꼼꼼하게 인식해 고도의 컨트롤을 요구하는 잠입 액션게임에 잘 어울릴 것 같더군요.
▲ 뒤통수 부분 밴드에 트래킹 장치가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빅브라더, 트래킹 인식 장치
이전 버전들에서 종종 지적됐던 그래픽 깨짐 현상이나 격자감은 육안으로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습니다. 실제 프레임 차이는 어느 정도인지 측정이 불가능하지만, 시연 내내 눈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는 없었습니다. 당장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가 눈 앞으로 뛰어오고 있는데, 계단 현상을 신경 쓸 새가 없죠.
압권은 에픽게임즈에서 언리얼 엔진 4로 제작한 데모였습니다. 이 데모는 특공대와 거대 로봇 사이에 벌어지는 도심 총격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모든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지나갑니다. 그 순간 불꽃을 발하는 총알과 스파크, 아스팔트 바닥에 고인 물, 그리고 특공대가 입은 특수재질 갑옷까지 모두 현실처럼 다가옵니다. 그 와중에 크레센트 베이를 착용한 사람의 몸만 멀쩡하니, 마치 투명 망토를 입고 치열한 싸움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시간을 늦추는 능력을 보유한 히어로가 된 느낌마저 듭니다.
대중화에 한 걸음 더
크레센트 베이의 재미있는 점은, 모든 부분에서 가히 ‘혁신’이라 할 만큼 DK2보다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권장 사양은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작년 이맘때 오큘러스VR 서동일 지사장이 게임메카를 방문했을 때, DK1을 시연하기 위해 사용한 컴퓨터에 내장된 그래픽 카드는 엔비디아 블랙 타이탄이고, 크레센트 베이 시연용 컴퓨터에 탑재된 것은 980 GTX입니다. 성능 자체는 높아졌지만, 가격으로 따졌을 때 980 GTX가 훨씬 저렴합니다. 이제는 고급형 그래픽 카드로도 충분히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는 것이지요.
더불어 무게도 가벼워졌습니다. 투박한 모양은 그대로지만, 뒤통수를 받쳐주는 드래킹 장치 덕분인지 착용 시 안정감이 높아졌고 흔들림도 덜 합니다. 고개를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아직 부담이 느껴지나, 걸어다니고 자세를 바꾸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큘러스 리프트는 7개월 만에 DK2에서 크레센트 베이로 진화했습니다. 기술 개발에 있어 그리 긴 기간은 아닌데, 놀라울 정도로 빠른 변화입니다. DK2에서 해상도가 조금 좋아진 정도를 기대했던 기자도 흠뻑 빠졌으니까요. 오큘러스VR 서동일 지사장은 크레센트 베이도 아직 실험단계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이대로 출시돼도 가상현실을 꿈꿨던 게이머들은 반가워할 퀄리티입니다. 어서 가상현실에 최적화 된 콘텐츠들이 다수 출시되어 오큘러스 리프트의 라인업을 풍성하게 해 주기를 내심 바라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