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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사이에 왕경(경주) 안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들이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 덕분이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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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껍게 쌓은 형태였다.
돌과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령 황남대총 남분의 전체 체적은 4만2291㎥에 이르렀다.
2.5t 트럭 2만4877대가 실어 날라야 하는 양이다. 나무 관 위에 곧바로 덮은 자갈돌(적석)의 양만 쳐도 1290㎥에 달했다. 돌의 양만 2.5t 트럭 758대분이었던 것이다.
실제 1900년대 초반 경주 황남동 고분군을 첫 발굴한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했지만 자갈돌이 끊이지 않고 나오자 끝내 조사를 중단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조선통감부의 지원 아래 권총까지 차고 공식발굴에 임했던 이마니시마저 끊임없이 솟구치는 자갈돌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만 것이다.
“도굴을 하려면 갱도를 뚫어야 하는데 그 엄청난 돌과 흙을 감당할 수 없죠. 곧 무너져서 생매장될 수밖에 없으니까…”(이한상 대전대 교수). 게다가 시간이 흘러 돌과 흙이 와르르 무너져 목관과 완전히 밀착됐기 때문에 관속 유물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신라인들은 이 왕릉급 무덤들에 금(동)관을 비롯한 황금유물들을 묻어놓았다. 살아있을 때처럼 사후세계까지 지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509131700315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