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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229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9
조회수 : 169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9/12 22: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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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아니 식민지 인들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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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조직이나 군 편제 등 이미 독립이후와 그 과정을 잘 준비하고 있었다는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끝난 이래로 식민지에서는 15-60세의 모든 남성들이 지역 의용군 중대에 가입하여 한달에 한번씩 훈련에 참가하고 비상소집에 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 전쟁과는 무관한 이야기 이지요, 

1775년 5월 10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제 2차 대륙회의가 열렸을 때 제일 처음 의결한 것은 보스턴을 포위 하고 있던 메사슈세츠 민병대와 티콘데리가 요새를 점령한 베네딕트 아놀드의 메사슈세츠 민병대, 에단 알렌 Ethan Allen이 이끄는 푸른산 청년단을 받아들이는 문제였습니다. 

6월 15일에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활약한 경험 많은 장교중 하나이며 당시 의회 내에 영향력이 컸던 버지니아 출신의 조지 워싱턴을 무급으로 종군한다는 조건하에 대륙군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대륙군을 지원하기 위해 2백만 달러를 긴급 발행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다시 두달후 프랭클린 벤자민을 국장으로 하는 우체국을 창설하고, 해군과 해병대의 창설을 승인했으며 외국의 원조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 이전까지 어떠한 정부조직이나 군편제가 전무했으며 법적 권한이나 하다못해 재원조차 없었습니다.

2.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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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탈영과 군 복무기간 만료로 해체 직전의 1천여명의 병사만을 가지고 있던 조지 워싱턴의 부대를 구한것은 3년간 복무하거나 전쟁이 그보다 일찍 끝날 경우 종전 때까지 복무한 자들에게 대륙회의가 약속한 100에이커의 땅과 20달러의 보상금 입니다. 

밸리 포지에서의 사례를 보면 조지 워싱턴이 혹독했던 겨울에 사망자와 탈영병, 제대하는 병사들로 당시 대륙군들이 모두 그러 했듯 무너져 가던 아니 무너진 군대를 가지고 조지 워싱턴이 그럴듯 한 훈련을 시키고 무언가를 제대로 할수 있게 된것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서 뉴저지, 델라웨어 및 매릴랜드의 동부해안 쪽까지 헨리 리 장군과, 너대니얼 그린 장군에게 대륙 의회가 상환을 보장한다는 영수증을 뿌리고 가축을 징발한 이후의 일입니다, 물론 이러한 군수표 발행에는 대륙 의회와 어떠한 사전의 상의도 없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와의 동맹이 체결되었다는 소식과 대륙회의가 전쟁이 끝난 후에 추가급료와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을 한 덕분에 입대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또한 주변 민가에서 지원이 시작되었죠, 

그리고 요크 전투를 사례로 그의 전술 능력을 높이 평가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요크 전투 이전에 휘그당원들로 이루어진 민병대와 콘월리스 간에 벌어진 킹스 마운틴의 전투나 당시 대륙군 사령관 너대니얼 그린이 콘월리스의 병력과 물자를 소모시킨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승리가 한 번만 더 있으면 우리는 끝장날 것이라고 영국 의회에서 탄식이 나올 정도로 거둔 대승을 비릇하여 뉴 포트의 드 그라세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영국군의 봉쇄를 뜷고 지원을 하러 남하하여 , 토마스 그레이브스 제독이 요크 타운의 콘월리스를 지원하는것을 막아내었고 당시 워싱턴의 병력이 고립된 콘월리스의 2배가 넘는다는 사실을 볼때 물론 대륙군의 형황을 파악하여 가장 적합한 소모전 즉 게릴라 전이라는 물자 보급이라는 강점을 최대한 살린 전투를 주요 전략으로 삼은 것으로 볼 때 전략적인 식견은 있었습니다만 세부적으로 전술적 능력이 있었다고 입증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브랜디타운 크리그나 저먼 타운에서의 전투에서 볼수 있듯이, 어떻게 본다면 상당히 전면전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즉 그의 리더쉽이나 전략적 능력이 전황에 어떠한 결정적 기여를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애기죠, 그리고 주변에서 왕으로 세우려 했다거나 하는 것은 낭설입니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거나 전하라고 부르게 하거나 하는것은 있었습니다만 당시 미국에서 대통령 연임에 관한 법이 없어 2번의 대통령직 연임 이후 낙향한것에 대하여 왕으로도 살수 있었다 라는 그런 뒷애기중에 하나일뿐이지요,


3. 독립에 대한 열망이 주요한 승리의 원인인가? 

독립에 대한 열망이야 말로 독립에 대한 독립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독립 전쟁의 주요한 승리의 원인이라 볼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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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이 뉴욕을 점령한 후, 많은 민간인들이 반란군 세력이 붕괴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수천명이 서둘러서 국왕에 대한 충성서약서에 서명했습니다.하지만 트렌톤과 프린스톤 사이에서의 승리로 그 전망은 뒤집혔지요. 영국군이 철수하자 반란군은 신속하게 뉴저지를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식민지인들은 여전히 국왕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대략 10만명이나 전체 인구의 3% 이상이 아메리카를 떠났다고 추정되는데. 이와 같은 사태를 촉발시킨 혁명에 대한 견해는 대략 3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지사(Patriots) 또는 휘그당원(Whigs), 토리당원(Tories), 그리고 더 조직적이고 활동적인 급진주의자들에게 휘둘리는 무관심한 중간그룹이 있었던 것이지요,토리당원들은 주로 항구도시에 집중되어있었지만, 그들은 온갖 직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총독과 판사 및 관리들은 영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영국국교회 목사들도 대부분 영국을 선호했고 식민지 상인들은 그들이 중상주의적 규제로 인해 이득을 보느냐 아니면 손실을 입느냐에 따라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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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주와 캐롤리나주의 시골에서는 많은 서민들이 국왕을 지지했습니다. 노스 캐롤리나에서 그랬듯이, 귀족적인 농장주들이 휘그당원인 경향이 있었던 반면에, 시골의 농부들은 토리당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것인데. 지사들이 한 지역을 장악하면 그 지역의 왕당파들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습니다. 재산을 뒤로 한 채 영국군을 따라가던가, 아니면 뒤에 남아서 지사들의 분노에 직면해야했던 것이죠. 미국 독립 전쟁은 보통은 식민지인들과 영국인들 사이의 투쟁으로 이해되지만, 독립전쟁은 또한 가족과 지역사회를 갈라놓은 내전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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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에 수반되는 동족상잔적 증오심으로 인하여 뉴욕주와 펜실베니아주의 시골지역과 조지아주에서 끔직한 잔혹행위가 빈발했는데, 조지아주에서는 토리당 병사들이 인디언들과 합세해서 변경의 휘그당원들을 공격하기도 했었지만. 반대로 휘그당원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왕당파를 공격하기도 했었죠, 무엇보다 앞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모든 주가 모든 사람이 같은 문제에 집중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식민지 주민들이 해안선을 따라서 시행된 영국의 규제적인 정책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었죠, 일부 미개척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인지법이나 타운셴드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흥분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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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플레인 호수 동쪽 땅을 둘러싼 소유권 분쟁으로 뉴욕과 뉴햄프셔가 반목했는데, 에단 알렌이 이끄는 푸른산 청년단도 이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결국 그 지역의 주민들이 1777년에 버몬트(Vermont)라는 독자적인 주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179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방의 일원으로 승인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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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ef Pontiac 폰티액 추장, 우리가 아는 그 자동차 폰티악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만들어 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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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에서는 일단의 변경의 무법자들이 법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폰티액의 반란 당시에 퀘이커교도들이 장악한 주의회가 변경을 방어해주었던 것과는 달리 자신들의 문제에는 주의회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분개한 팩스톤 청년단 이라 불리는 집단은 랭카스터 카운티에 살고있던 평화적인 코네스토가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베들레헴 근처에서 모라비아교파로 집단 개종해 살고있던 소위 모라비안 인디언들을 위협했습니다. 모라비안 인디언들이 필라델피아로 피신해오자 약 1,500명의 팩스톤 청년단원들이 필라델피아로 진군해왔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들에게 주의회가 앞으로는 변경의 수비를 강화해줄 것이라고 약속해서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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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캐롤리나 변경의 이주민들도 소도둑, 말도둑 및 인디언들로부터 주가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단속자들이라 불리는 자경단을 조직하여 그 지역에서 법을 집행했으며, 주가 효과적인 행정을 펼칠 때까지 납세를 거부하게 됩니다. 1769년에 주의회는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6개의 순회법원을 신설하고 세법을 개정했지만, 의회에 대표를 선출할 수 있게 해달라는 변경지역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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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스캐롤리나에서는 행정의 미흡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동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자행하는 권력남용과 착취에 대해서 항의가 일어났습니다. 1766년에 그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했습니다만 1771년 봄에는 알라만스 전투에서 국왕의 총독과 1,200명의 민병대원들이 약 2,000명의 엉성하게 조직된 "단속자들"을 격퇴합니다. 그 대격전은 변경의 이주민들과 동부의 부유한 농장주들 간의 점증하는 긴장상태를 나타내주며, 그 긴장상태는 혁명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시 폭발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고 또 사실이 되었습니다. 

식민지 내에서의 이 내부적 논쟁과 폭동들은 혁명직전의 아메리카인들 사이에서의 견해와 전망의 분파적 다양성을 나타내줍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의 지배를 포함한 많은 문제들에 관하여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국왕에게 자비를 구하며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는 올리브 가지 청원 과 무기를 들게된 원인과 필요성에 대한 선언을 우체국을 세우고 해병과 해군을 승인하며 정부 내각을 구성하고 군을 정비하던 사실상 충돌이 벌어진지 2달 후에나 한것이나 독립선언을 1년 뒤에 한것 등도 어느정도 사례라 볼수가 있겠습니다만 위와 같은 사례로 볼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즉 요소는 될 지언정 주요 원인은 아님을 알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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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실상 독립에 주요한 요인이 된 것은 무엇인가를 간단하게 보면 외국의 구체적으로 프랑스의 도움과 무능한 영국군 지휘부 라고 볼수가 있습니다.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사라토가 전투의 승리 이후 참전한 프랑스 해군은 여전히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전황을 불리하게 몰아가고 있던 미국 아니 대륙군의 '뱃놈'들과 다르게 영국의 지원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합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사라토가 이전에도 군수물자를 실은 14척의 배를 보냈습니다만,) 대륙군에 물자를 비릇한 병력을 공급하며 전세를 돌려놓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이후에 스페인을 영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 주겠다는 약속으로 참전시키며 프랑스와 미국에 대한 무역에 대한 영국의 강제령에 반발한 네덜란드도 참전하게 됩니다. 또한 영국군 지휘부의 무능을 보여주는 사례를 보면 챔플레인 호수를 향해 남하하던 부르고인 장군을 들수가 있는데, 야전의 기동성을 무시하고 진군하여 게릴라 전을 벌이는 대륙군에 대한 대응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장에 자신의 정부도 데리고갔으며 그의 옷가방과 샴페인이 마차 30대 분량에 달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의 처음 계획은 식민지주들을 양분할 것을 제안했던 것으로, 그의 병사들은 캐나다에서 허드슨강으로 남진할 것이었고, 또다른 병력이 오스웨고 요새 로부터 모호크계곡 을 따라서 동진할 것이었습니다. 다른 영국 장군인 하우장군도 뉴잉글랜드를 공격하는 계획과 결합된 비슷한 계획을 제안했었는데. 부르고인 장군이 그 계획을 고수했었더라면 그는 식민지 주들을 양분한 후 결정타를 날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펜실베니아의 토리당원들이 봉기할것을 '기대'하는 도박에 기대어 필라델피아를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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