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重陽, 일본식 이름: 朴忠重陽 호추 시게요1872.05.03 ~ 1959.04.23 '나도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니 시원하게 죽여라[1] - 해악 박중양 선생
독립운동가 왈 : 정말 해악한 인간이로다.조선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조선 혐오형, 신념형 친일파 정치인이다.구한 말에 경상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관찰사를 지냈고, 일제 강점기때는 충청남도 도장관, 황해도지사, 충청북도 도지사 등을 지냈으며 중추원 참의,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이토 히로부미를 인격자로 칭송하고,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여 화제가 됐다. 자는 원근(源根), 호는 해악(海岳), 일소(一笑). 본명은 박원근. 우리가 흔히 아는 기회주의적 친일파들과는 다른 점은 기회주의적, 권력추구형 친일파가 아니라 신념적인 친일파였다는 점이다. 그가 친일파가 된 결정적 이유는 갑신정변 이후, 정변을 일으켰던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무참히 고문하고 살해하는 조선에 대해 충격을 받고 회의감을 가진 이후부터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관료시절에 뇌물 한푼 받지 않았다는 점,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들의 협박해도 떳떳하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2]을 보면 기회주의적 친일파들과 동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친일행위와 별개로 그의 신념은 철학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것들이 많다. 쩼든 친일파인건 맞다비슷한 인물로 윤치호가 지목되지만 윤치호는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박중양과는 다소 다른 케이스. 박중양은 주권을 넘기고 일본에게서 작위를 받았던 다른 친일파들과도 조금 다른 유형의 친일파이다. 그의 출신은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3], 가계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반남 박씨라는 설과 밀양 박씨라는 설이 있다.[4] 아버지 박정호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마름 노릇을 했다고 한다.원래 그의 조상들이 살던 곳은 대구인데 후일 그가 대구로 정착한 이유는 일본에 상권을 넘겨주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있다.[5]청년 무렵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897년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0년에 토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 실습하였다.1903년 동경부기학교에서 은행업무를 배웠으며, 이 당시에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했다. 1904년 졸업후 귀곡했다.귀국직후 대한제국 관리서 주사가 됐으나 사직하고 1905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고등통역관으로 참전해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였다.1905년에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 1년간 거처하였다. 1년 후 군부기사가 되고 그해 군부 파견원으로 의친왕이 일본을 방문할 때 통역관으로 의친왕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그뒤 대구판관으로 부임했다가 바로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로 승진했다.이때 그는 대구읍성의 철거를 주도했다 한다. 그의 후반생 은거지가 되었던 대구시 침산동의 침산(砧山·일명 박짝때기산·현 침산공원)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의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인들이 주선해 준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 있다.[6]1907년에는 평안북도관찰사와 평안남도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경북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고, 대구읍성 철거때 하고 전라남도 재직 시의 면세 등의 수완으로 이임 때는 금시계를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 직전에 충청남도 관찰사가 됐다. 한일 합방이 되었으나 슬퍼하지 않고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여 화제가 됐다.1910년부터 1912년까지 충청남도 도장관을 거쳤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자제단 본부를 조직, 발기하여 단장을 맡고, 대구 자제단과 경성 자제단을 이끌었다.[7] 만세반대운동과 시위대 해산, 진압 운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황해도지사가 되었다가 1923년 충청북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에는 속리산에 갔다가 길이 비포장도로라서 보은군청 토목기사를 시켜서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길을 닦았다. 농번기의 농민 동원으로 원망이 자자하였지만 일주일만에 비포장 2차선 도로가 뚝딱 하고 생겨났다.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여승을 성추행, 변사하게 한 일[8]로 사직하고 대기 발령되었다가 1925년 사퇴했다. 1927년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가 되었다.1928년 다시 황해도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어 1939년까지 재직했다. 1936년부터는 칙임관대우 참의가 되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여러번 조선인의 참정권 허용론을 건의하였다.1938년에 조선총독부가 제2의 중추원으로써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할 때, 총 97명 가운데 조선인 위원은 11명이었다. 이때 박중양은 박영철(朴榮喆), 김연수 등과 함께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조선인 위원으로 위촉되어 총독의 자문사항을 심의했다.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그해 10월 22일 부민관에서 출범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도병 출전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일본육군이 싱가폴을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싱가폴을 방문하기까지 했다.[9]1942년 조선인 몫의 일본 귀족원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 고사했다.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45년 4월 3일에 박상준(朴相駿) 등 6명과 함께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해방 후 1945년 9월 미군정이 주둔하자 귀족원 의원과 중추원 부의장에서 파면되었다.벼슬이 높아진 박중양은 중년 이후 이 개화장을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에서 가져다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였다.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했나 하면,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출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해방 이후 그는 친일파로 몰려 규탄을 당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미군정장관 하지와, 아서 러치, 이승만을 찾아가서는 나같은 놈이 진짜 친일파이니 나를 죽이면 된다고 강변했다. '좁은 조선이 남북으로 갈려 있고 특히 이런 과도기에, 숨은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데, 왜 있는 인재를 없애려 하느냐? 그러니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떠들기보다 그 사람들을 잘 이용해 주시오. 그 사람들을 두고 누구를 데리고 일을 하겠소. ... 나같은 것은 친일파의 대표자이니 연령으로 봐도 그렇고 행적으로 봐도 그러니 어떠한 처단을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감수하겠다'는 것이다.당연한 이야기지만 고위직으로 활동한 만큼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은 당연하고, 이후 1949년 1월에 반민특별위원회에 의해 친일 행위자로 처벌 대상이 되어 체포었으나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민특위 조사관의 진술에 의하면 그를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의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아, 고꼬가무까시노 다이이치긴꼬다네. 소!소!(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은행이구나. 그래!그래!)”고 한다.[10] 이를 두고 수사관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는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광수, 최남선 등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고, 반성이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11]법정에서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하였고, 신분차별 지역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과 조선총독부에 대한 반감은 일본인에 대한 맹목적인 편견의 결과이며, 이토 히로부미는 인격자라고 주장하여 주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이광수 등 대부분의 친일파가 자신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식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과는 대조적. 공판기간 중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며칠 후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병원에서 몇 개월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가짜 애국자들이라고 조롱하고 이들을 비아냥대는 내용의 자료를 대량 인쇄, 배포했고 소주영 정신과에서 정신감정을 받았으며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59년 4월 23일에 사망하였다.여담으로 이승만을 주한미군 없으면 '도망부터 칠 놈[12]' 이라고 조롱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박중양 왈 : 난 위선적인 놈들이 싫다'그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1949년 1월까지 계속 일기를 썼다 한다. 반민특위 수사관에 의하면 특위 대구지부에 연행되어 온 전날까지 그는 수십 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두 정자로. 나는 그가 비록 친일 반민족 행위자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13] 술을 좋아해서 맥주를 60병 가까이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