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역사를 짧은 시간 동안 공부하다 보니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너무 안타깝고, 슬픈 사연들이 왜이렇게 많은지..
조선을 공부할 수록 드는 생각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오염된 지식에 물들어 있었나" 이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 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식민 사관' 내 머릿속에 조선은 되게 보수적이며, 가부장적, 권위적, 폭군의 폭정이 있었으며, 당쟁이 잦았다는 인식이 나도 모르게 있었는데 배우면 배울 수록 오랜 시간 왕조를 유지한 조선의 힘이 놀랍고, 나의 잘못된 지식에도 놀랍다ㅎㅎㅎㅎ...
조선의 힘은 바로 조선의 참신한 시스템이다.
조선의 왕은 왕은 새벽 5시 경에 일어나고, 잠자리는 12시가 넘어야 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에 적게는 1번, 보통 3번씩 신하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는 '경연'을 해야 했으며 (이 '경연'이 정말 피말리고 힘든 시간이라 조선의 폭군들은 집권하자마자 대부분 경연을 없애버렸다고...ㅎㅎ)
사냥을 나가 말을 탄 상태에서 하는 말까지 실록에 모두 기록될 정도로 개인 생활이 없었고, 심지어는 잠자리 까지도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시간 동안 해야 했다고..
또 조선의 기록 문화는 감히 지금 대한민국의 기록 시스템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왕은 자신의 사초, 자신의 실록을 절대로 볼 수 없다.
이는 실록을 기록하는 신하들이 신랄하게 왕의 정치를 평가하고 사실대로 기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록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놀랐던 부분은 정치 조직에서 언론을 담당했던 3사와 3사의 인사를 담당했던 이조 이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의견은 '여론'이다.
그 여론, 즉 공론을 이끄는 기관이 바로 '언론'기관인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올바른 여론이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언론 기관이며 왕권을 견제했던 기관인 '3사'는 과거제에서 '문과'출신인 사람들만 갈 수 있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의 과거제는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가 가능했지만 '문과'만은 서얼, 탐관의 자, 재가녀의 자는 응시가 불가했다.
그렇기에 신분 상의 아무런 흠이 없는 자들만 3사의 언관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3사의 언관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왕의 정치에 날카로운 말을 서슴없이 했으며, 이 3사의 언관직을 지낸 자만이 정승과 같은 높은 직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3사는 아주 맑고 청렴하며 중요한 직이라 하여 '청요직 淸要職'이라고 불렸다.
속한 말로 조선의 윗대가리들은 최강의 도덕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 시스템이 놀라운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청요직의 인사권을 쥔 자가 바로 '이조'의 '전랑'이라는 것이다.
조선에서 각 부처의 우두머리는 '판서'이다. 이조는 인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이조의 우두머리 역시 이조 판서이다.
앞서 말한 이조에서 '전랑'이라는 관직은 판서에 비하면 아주 낮은, 지금으로 치면 사무관 정도의 젊은이가 맡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이조전랑직은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3사 언관직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조 전랑직의 인사권을 판서가 가지고 있으면 이조 전랑은 판서의 꼭두각시일 뿐이었을 텐데, 이조 전랑직은 후임자 추천권을 자기 자신이 가진다.
즉 자신의 후임자를 자기가 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관리 중 가장 빛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젊은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조선.
내가 생각했던 조선과는 아주 아주 많이 달랐고, 역사를 배우면 배울 수록 그렇게나 오랜 기간 동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 느껴진다.
순간순간은 진보와 퇴보가 번갈아 나타나며 우여곡절이 많지만 크게 보면 역사는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보하면서 흘러간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언론기관은 어떻고, 지금의 기록 시스템은 어떻고, 지금의 나라를 팔아먹었던 역적들에 대한 태도는 어떻고, 지금 사회의 계층 구조는 어떻고, 야당과 여당이 더 나은 정치를 위해 서로의 세계관을 주장하면서 말하는 그들의 정치는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