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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국방부 장관 신성모
게시물ID : history_228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곡길계
추천 : 4
조회수 : 717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9/04 19:55:07
신성모는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 장관이다.  그의 벙크짓을 알아보자. 

출신 - 신성모는 1891년 경남 의령 출신이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 독립자금을 전달하다 체포되어 1925년 출소하였다.  이후 런던으로 가 항해사 자격증을 따고 1948년까지 인도의 선박회사에서 항해사, 선장 및 고문으로 일하였다.  
국방부장관 - 1948년 환국하여 이승만은 그를 국방부장관에 임명했는데, 그이유는 영어를 잘하고 선장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군복무나 전투경험은 전혀 없었다.  

낙루장관- 그에게는 낙루장관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승만이 무슨말만 하면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부를 했다고 한다.  한 일화로 이승만이 낚시를 하다가 방구를 뀌었는데, 옆에 있던 신성모가 눈물을 흘리며, '각하! 참 시원하시겠습니다.' 라고 흐느꼈다고 한다.  

6.25 북침설 제공 - 6.25 가 일어나기 전 전쟁의 조짐은 많았다.  이승만은 평소에 신성모를 불러 '만약에 북한과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겠나?' 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마다 신성모는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국군이 100% 이깁니다.  아침은 개성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의주에서 먹을겁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얘기를 했다.  그러나 실제 6.25가 터지자, 남한은 탈탈탈 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성모는 이승만에게 거짓보고를 한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승리하고 있습니다.  국군은 북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보고서가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에게 넘어가고, 그때부터 북한은 이 보고서를 근거로 6.25는 북침설을 주장한다.   

6.25에 관한 보고- 6월 23일 38선 근처에서 대규모의 북한 화기 차량이 이동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신성모는 장교클럽에서 노느라 이를 무시한다.  또한 6월 27일 새벽4시에 일어난 국무회의에서 신성모는 전황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고 발언했다. 

한강다리폭파 - 이승만이 거짓말로 서울사수를 외치고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튀고 나서, 서울시민들도 뒤늦게 북한군이 침공할것을 알게된다.  당시 한강에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때 신성모가 북한군의 도강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최창식 대령에게 명령해 다리를 폭파시킨다.  다리를 건너고 있던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어을 뿐만 아니라, 어쩔수 없이 강북에 남게된 시민중 수많은 사람들은 서울수복이후 빨갱이로 몰려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보도연맹사건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를 보면 이은주가 강냉이 받았다고 빨갱이로 몰려 죽는다.  신성모는 나중에 이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책임을 최창식 대령에게 뒤집어씌우고 1950년 9월 21일 최창식을 총살시킨 뒤 입을 닦았다.  

국민방위군- 신성모가 이승만과 같이 부산까지 도망간후 이승만에게 '쪽수로 북한군을 밀어보자'고 건의.  남자란 남자는 죄다 징집해 10만명의 국민방위군을 결성해 북으로 투입한다.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당연히 보급해주어야 할 의복, 무기, 식량등을 신성모를 비롯한 장교들이 모두 착복을 한다.  10만명의 국민방위군은 여름철에나 입을 만한 얋은 옷을 입고 최전선으로 행군하다 대부분 동사한다.   

국방장관 해임 및 그후 - 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은폐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국방장관에서 해임됬다.  현재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있고, 한국해양학회에서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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