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밑도끝도 없이 환빠운운할 분들은
1.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가 왜 환단고기랑 같은 류의 책인지..
2.이책이 중국에서 인정안하는 위서인지..
3.이책이 중국에서 인정하는 유사역사책인지등등...아는분있음 정보전달 부탁요~~
그런것도 없이 무조건 자기들 아는거랑 다르다고 환빠니 유사역사니 하는거...이젠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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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이 옮겨간 평양이 지안(황성)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가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옮긴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사는 장수태왕이 아닌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설명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신동아 2013년 2월호 참조).
삼국사기는 고국원왕 13년 7월 조(앞에서 ‘동’을 고딕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도읍을)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겼다. 이 성(황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고 함으로써,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삼국유사도 ‘(고조선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이는 평양에 대한 현재 해석을 완전 뒤집는 중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역사학계는 고려가 서경이라고 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고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이북 평양이 고려와 조선의 평양이다’라는 주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과 다르다.
고구려의 평양이 이북 평양이 아니라는 것은 조선시대 청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갔던 이들이 써놓은 여행기에서 숱하게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요양 근처로 가니 그곳을 평양이라고 한다. 조선에 있는 평양과 어떻게 다른가’란 의문을 남겨놓았다....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신동아 9월호/현지취재] ‘잃어버린 땅’ 고구려 고토(古土)를 가다 ● 삼국사기의 ‘東’자를 해석하지 않은 역사학계 ● 지안(集安)엔 국내성 아닌 황성이 있었다● 장수태왕은 이북 평양으로 천도한 적 없다● 말로만 식민사관 탈피, 실제론 일제 史觀에 묶여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다. 조선사는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폈다고 써놓았다. 일제는 고구려의 힘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싫어 이렇게 했을 수 있는데,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그대로 사용해왔다....
.........만리장성 근처까지 차지
당나라 때 ‘두우’라는 중국인이 만든 책 ‘통전(通典)’에는 ‘’지금(당나라 시절) 북평군 남쪽 20여리는 고려(고구려) 땅인데 그곳에 좌갈석이 있다[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라고 해놓았다. 이는 고구려가 좌갈석산을 차지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산해관 근처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만리장성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의무려산도 넘어가지 못한 모양으로 고구려 최대 영토를 그린다.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잘못 비정했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도 좁게 그리는 어리석음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웃는 것은 통전을 비롯해 많은 사서와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땅을 차지한 중국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언제 식민사학에서 벗어날까. 고구려의 원혼이 땅을 칠 노릇이다.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