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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랑동급?대륙백제를 다룬 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
게시물ID : history_228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ckk
추천 : 3/8
조회수 : 1813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5/09/04 15:36:41
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가 중국에서

환단고기랑 같은 책이라고 하나요?

아님 유사역사책이라고 중국에서 개무시하나요???

삼국사기는 빼더라도 

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등등 중국역사책에 나온 백제관련이야에

환단고기네 유사역사내 개거품무는 분들은 

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등등 중국역사책

도 환단고기랑같은 책이다 내지는 유사역사책이라도 당당하게 애길할수있나요?ㅋ.

아님 환단고기서 어떤부분이 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랑 똑같아서

다 유사역사책이다...라고 애기할 근거자료는있나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243&cid=46620&categoryId=466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제요서경략

西 ]

이칭별칭 백제요서진출설, 백제대륙진출설
유형 개념용어
시대 고대/삼국

정의

4세기 경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을 경략해 군()을 설치하고 지배했다는 설.

연원 및 변천

백제요서경략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송서()』 백제전()에 실려 있다. 즉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니, 백제는 요서(西)를 점령하고 진평군() 진평현에 이 지역의 통치기관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송서』는 심약(, 441∼513)이 편찬한 사서이다. 그는 송과 남제()에 걸쳐 관직에 있었으며, 남제에서는 상서령()을 역임하였다.

『양서()』 백제전에서도 “진()나라 때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지배에 대응해 요서·진평 두 군을 점령하고 그 땅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양 직공도(: 양나라에 조공해 온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설명을 곁들인 화첩)의 백제국기()에 “백제는 옛날의 내이()이며, 마한() 족속이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진평현을 경략하였다.”고 하여 점령시기가 진나라 말기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남사()』 백제전 및 『통전()』 변방문() 백제조에서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통전』에서는 요서·진평 두 군의 지역에 대해 “오늘날(7세기 말)의 유성()과 북평() 사이”라고 주석을 붙였다.

이 밖에도 『진서()』 모용황재기()에 의하면, 345년 모용황의 기실참군()인 봉유()가 상소를 올려, 전연()의 팽창에 따라 포로로 잡아온 고구려인·백제인 및 선비족()의 우문부()와 단부() 사람들이 전연의 수도인 용성(: 지금의 중국 조양)에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어 우려가 된다고 하였다.

또 『자치통감()』 효종목황제() 영화() 2년조에는, 346년 모용황이 부여를 공략할 때 당시 부여의 상황에 대해 “전에 부여가 백제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해왔는데 방어가 미비하였다.”고 하였다.

『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요서지방의 백제세력에 관한 단편적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모용씨의 전연은 유목민인 선비족 출신으로서, 당시 세력 중심지와 지배지역은 만주 서부지방과 북중국이었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 백제지역에 세력을 미칠 수 없었다.

또한 백제도 북만주의 부여를 반도 서남부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곧바로 공략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두 기사의 사실은 당시 백제가 요서지방에 세력근거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위서()』 물길전()에 물길이 해로를 통해 백제와 연결, 고구려를 칠 계획을 북위에 통보하고 북위의 의사를 묻는 기록이 보인다. 이 역시 동북부 만주에 있던 물길이 해로로 백제와의 연결을 모색한 것은, 비록 이미 6세기 초 당시에는 소멸되었더라도 요서지역까지 진출한 바 있는 백제의 세력에 대한 기대에서일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용

역사서에 전해지는 백제와 북중국 세력과의 충돌은 490년(동성왕 12)에 있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488년으로 되어 있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이 해(490)에 북위가 또 수십만을 동원해 백제 영토에 침입하니 모대(: 동성왕)가 장군 사법명()·찬수류()·목간나()를 보내어 군대를 이끌고 북위군을 쳐 대파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실린 백제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495년)에서 동성왕은 490년 북위에 대한 승리를 과시하면서 사법명 등에게 자신이 수여한 왕과 장군 칭호를 남제가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백제와 북위와의 충돌은, 유목민족인 선비족 척발씨()의 북위() 군대가 바다를 건너 백제 영역에 침공한 것으로 볼 수는 없고, 대륙에 설치되어 있던 백제 영역에 대한 공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양국이 충돌한 지역이 백제 영역에서였다는 견해도 있고, 요서지역이 아니더라도 북중국 해안지대에 설치된 백제세력 근거지를 둘러싼 충돌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동성왕이 남제에 요청한 사법명 등의 관작 칭호에 붙여진 명칭이 대체로 북중국의 동부해안지대의 지명인 것을 보면 백제세력이 당시 이 지역 해안지대에 뻗쳐 있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571년에 북제()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의 직을 수여하였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력을 승인한 것으로, 동청주는 오늘날 산동성 자오저우만() 일대지역으로 간주된다.

이상은 백제의 요서경략을 긍정하는 입장의 견해를 서술한 것이다. 대체로 백제의 요서경략은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 무렵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해 송()·양() 등 남중국 왕조의 역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위서』나 『북제서』, 그리고 『북사()』 등 북중국 왕조에 관한 역사서에서는 언급이 없다. 백제가 요서지방을 경략했다면, 그 지역과 땅을 접하고 있어 직접 관계가 되었던 북중국의 왕조와 고구려의 역사서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보여야 마땅하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명확한 기록이 없다.

아울러 요서지방은 한반도의 서남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천 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 백제가 진출해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간다. 그래서 이에 관한 긍정론과 부정론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조선 순조(, 1800∼1834) 때 한진서()는 “생각건대 바다 건너 만 리가 되는 요서지방에 수 개의 군()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송서』의 기록은 명백히 잘못이고, 『양서』와 『문헌통고』는 한갓 『송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으로 족히 믿을 바가 못 된다.”고 하였다. 반면 신경준()은 중국기록에 명백히 나오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서 우리의 역사책이 이를 빠뜨렸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 뒤 신채호()·손진태() 등이 긍정론을 제기했으며, 일본인 나가 미치요() 등은 부정하였다. 대체로 부정하거나 묵살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다시 긍정론이 제기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백제요서경략 사실은 비단 백제의 해외진출의 실상을 파악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고대국가 백제의 발전과정을 파악하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요서지방을 경략했다면, 위에서 보았듯이 345년경 이전에 이미 백제세력이 이 지역으로 진출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 무렵 바다 건너 수 천리 떨어진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고 지배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 백제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백제사회와 국가체체의 발전이라는 면과 연결지어, 요서진출의 진위()는 보다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해동역사(海東繹史)』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서(宋書)』
  • 『남제서(南齊書)』
  • 『양서(梁書)』
  • 『위서(魏書)』
  • 『통전(通典)』
  • 『남사(南史)』
  • 『자치통감(資治通鑑)』
  • 「백제 대륙진출설의 제문제」(강종훈, 『한국고대사논총(韓國古代史論叢)』4, 1992)
  • 「백제군(百濟軍)의 화북진출(華北進出)과 그 배경(背景)」(방선주, 『백산학보(白山學報)』11, 1971)
  • 「백제(百濟)의 요서경략(遼西經略)에 대(對)하여」(김상기, 『백산학보(白山學報)』3,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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