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읽기도 쉬우면서 흥미로운 주제의 글을 발견한거 같습니다.
일전에 복수관에 대한 조선시대를 대상으로한 논문은 접한적이 있었는데 한국 고대사를 대상으로한 복수관은 처음이라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이 글의 주된 주제는 한국 고대사에서 복수관이 어떻게 존재했고 그것이 율령이라는 고대의 법령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1. 국가와 복수
다들 아시는 것처럼 고대의 복수란 동해보복의 원칙을 기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동서를 구분치 않는 당연한 이치이며 특히나 보복주의의 대명사로 알려진 함무라이법전에 잘 나타난 원칙입니다.
이런 '응보'의 논리는 현 시대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 무척이나 뻔한 레파토리이지만 '부모의 복수를 위해 10년간 칼을 갈았다' 라는 무협지의 맨트(혹은 코미디 프로의)는 피해자에게는 가해자에게 가할 당연한 권리이자 가해자가 반드시 처해야만 하는 피의 결과물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복수 그리고 응보의 원리는 당연하게도 국가 통치와 정면으로 충돌하곤 마련입니다. 현대의 국가 법령에서는 사적인 보복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사적인 복수 행위가 용인 되었을 경우 사회적인 혼란은 물론이고 심할경우 국가 차원의 붕괴 내지는 국제적인 갈등으로까지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수의 위험성은 고려 경종때의 복수법에서 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王嘗許先朝被讒人子孫復讎, 遂相擅殺, 復致寃號. 及是, 詵托以復讎, 矯殺太祖子天安府院郞君, 於是, 貶詵, 仍禁擅殺復讎.
왕이 선대왕의 조정(광종)에서 참소를 당한이의 자손의 복수를 허용했고 비로서 맘대로 서로 죽이며 원통함을 갚았다. 이에 미치자 선이 복수에 의탁하여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랑군을 교살하였고 이에 선이 낮아지고 함부러 죽여 복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고려사 경종원년의 기사인데, 한마디로 난장판이 됬음을 말합니다. 심지어 왕족까지도 죽었으니 국가의 상황이 말이 아니게 된것이지요. 결국 이런 복수법은 금지됩니다.
물론 경종대의 복수법은 광종조의 엄청난 숙청이후의 반작용이 과하게 등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최소한 고려 초기에는 개인의 원한에 대해서 복수할 법이 없었으며 그나마 생겼던 경종조의 복수법도 국가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소멸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복수에 대한 관념은 재밌게도 유교적인 덕목과 정면으로 상치됩니다.
춘추공양전에는 아비가 (국가에 의해) 주살되지 않았다면 자식은 복수할 수 있다 고 하거나, 예기 에서 아비의 원수를 불구대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교는 복수를 긍정했고 심지어 임금을 시해한 자 를 토벌하지 않으면 신하가 아니고, 아비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자식이 아 니다 고 하여 복수를 이행하지 못한 자를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에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된것은 아마도 율령의 반포시기라고 봅니다. 그러니깐 고대시대이지요. 고려 이전부터 국가적인 통치 원리로 제시된 유교는 복수에 대한 긍정론으로 일관하고 있으나 고려 경종의 복수법 기사는 이를 법령적으로 금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령이 선 국가는 사적인 복수에 대해서 용인적인 태도를 보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차원의 사적 복수 금지 사례는 당연하다 싶이 국가 율령의 선포를 계기로 금지 되었다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마침 중국에서는 조위에서 무고와 복수를 금하는 율령이 내려진바가 있습니다. 중국으로 부터 율령체계를 수용한 삼국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고대의 법속과 복수
하지만 불행히도 삼국유사와 사기 그리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고대의 기사들은 율령 이후에도 복수가 수행되고 이것이 응보로써 기록된 사례들이 보입니다.
삼국사기와 유사가 고려 후기에 저술되어 삼국시대와 고려 초의 기록들을 참고해서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복수를 응보로써 인식한 사회적인 인식은 삼국들이 율령을 수용한 이후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간접 증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평왕대의 익선과 죽지랑의 사건 입니다.
到富山城問閽人得烏失奚在人曰今在 益宣 田隨例赴役郎歸田以所將酒餅饗之請暇扵 益宣 將欲偕還 益宣 固禁不許時有使吏侃珎管收推火郡 能節租三十石輸送城中羙郎之重士風味鄙宣暗塞不通乃以所領三十石贈 益宣 助請猶不許又以珎節舎知騎馬鞍具貽之乃許朝廷花主聞之遣使取 益宣 将洗浴其垢醜宣逃隠掠其長子而去時仲冬極寒之日浴洗扵城内池中仍合 凍死大王聞之勑牟梁里人從官者並合黜遣更不接公署不著黒衣若爲僧者不合入鍾皷寺中勑史上偘珎子孫爲枰定户孫標異之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 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문지기는 답하기를, “지금 익선 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 은 밭으로 가서 가져간 술과 떡을 대접하였다. 익선 에게 휴가를 청하니 함께 돌아가려고 했으나 익선 은 굳이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간진이 추화군 능절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고 있었는데, 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름답게 보고, 익선 의 어리석은 고집과 융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 에게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또 진절 사지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가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 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을 씻기려고 하니 익선 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그때는 중의 몹시 추운 날이였으므로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이내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칙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서 벼슬하는 자는 모두 쫒아내어 다시는 관서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도 종고를 단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왕은) 사신에게 명하여 간진 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으로 삼고 그를 표창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익선은 죽지랑과 갈등을 빗었고 이에 조정의 화주가 직접 익선을 처벌하였습니다. 심지어 그 맏아들을 잡아서 동사를 시켜서 죽여버리지요. 이는 공적인 처벌로 볼 수 없습니다. 진평왕대이니 응당 율령은 있었을텐데 화랑의 조직차원에서 죽지랑에 대한 모욕을 보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진평왕은 죽지랑과 화주의 편을 들어줍니다. 죽지랑을 도와준 간진에게는 상을 그리고 익선이 출신이던 모량리의 사람에게는 처벌을 내리지요. 이는 국가차원에서 사적인 복수를 긍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 보다 앞선 시기의 풍속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조선의 법금 8조에는 복수주의로 해석될만한 조항이 있습니다.
상대가 죽이면 당시에 죽임으로써 갚는다. 상대가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써 배상하도록 한다. 상대가 도둑질 하면 남자는 그 집의 노를 삼고 여자는 비를 삼는다. 이를 면하려면 1인당 50만을 내야한다.
이는 고조선의 사회가 복수를 관습적으로 응보로 인식하는 사회였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섭하가 살해된 것 또한 참고할만 합니다.
고조선은 우거왕에 대한 회유가 실패한 섭하가 고조선의 전송사절을 살해한 것에 대해서 '원망하여' 죽였다 라고 합니다. 한나라는 강국입니다. 당시의 고조선은 평양일대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살려 일전을 준비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국제적인 난제에 대해서 다른 외교 정치적인 수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에 주목하여 "사단을 일으킨 섭하를 지목하여 처단했다. 이는 살인자는 죽인다 는 범금 조항을 대외에도 적용한 것이고, 더 나아가 생각하면 고조선 사회에서 이뤄지던 복수 살인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부여의 사례는 더 많은 것을 시사 합니다.
부여 또한 고조선과 마찬가지고 복수주의적인 법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중대사(살인등)를 1년에 한번인 영고에서 다루지요.
하지만 저자는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중대사를 오직 영고에서만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봅니다. ㅇ영고는 1년에 한번이니깐요.
결국 이런 추론에 따라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추정이 허용된다면, 부여에서도 살인은 엄금되고 살인자는 처벌받았지만 복수 살인은 처벌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국가는 복수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는 살인을 금지함으로써 복수 살인의 소지를없애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단 살인이 벌어지고 국가의 사법권이 미치기 전에피해자 측의 복수가 이뤄지면 이에 간여하지 않은 듯하다. 이를조금 더 확대 해석하면 복수 살인이 국가의 사법권 행사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상 이 논문의 핵심인데, 결국 고대국가는 사적인 복수를 사법권의 적용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겁니다.
3. 복수의 국가이념화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저자는 "한국 고대국가에서는 복수의 사회적 효용성이 인정되어 율령 반포 후에도 사적 복수가 용인되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런 용인된 사적 복수들이 국가이념화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倭人不荅執之積柴置其上燒殺之乃去于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그를 잡았다.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앉히고 그를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于老妻請於國王私饗倭使臣及其泥醉使壯士曵下庭焚之以報前怨
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곧 그가 술에 몹시 취하게 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려 그를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석우로의 일화 입니다. 이는 내물왕대의 기록으로 추측되지만 이기동 교수님의 연구를 따르면 우로 전설은 원래 동해안 남부 지역에 있던 소국 수장의 활약상을 신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석씨 왕실 설화의 일부로 흡수하여 형성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신라는 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치열한 삼국 간 전쟁의 와중에서 인민들의 충절을 유도하는 데 이 복수설화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할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삼국이 복수를 국가이념화 하여 사용한 흔적은 다양하게 확인 됩니다.
대야성을 잃은 김춘추와 김유신은 백제를 '나라의 원수'라고 불었고 이후에 백제와 신라의 공방전은 복수와 응징의 관계로 불릴만큼 잔혹합니다.
신라가 성왕을 참수한 데 대해서 백제는 대야성을 함락한 후 김품석과 그 부인을 처형하고 그 시신을 백제의 감옥 바닥에 묻었고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검일은 모척과 내통했습니다. 신라군은 사비성을 빼앗은 후 특별히 검일을 사로잡아 추궁하고 잔혹하게 처단하는 것으로 복수를 했지요.
결국 저자는 이러한 삼국의 복수에 대한 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합니다
"삼국 모두는 복수 윤리를 국가의 이념으로 승화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감투정신을 발휘하도록 고무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복수의 논리가 순국의 이념으로 확대되고 부자간의 효애, 그리고 화랑도의 사우관계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덕목과 결합할 수 있었다."
4. 복수에 대한 제어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앞서서 고려 경종 복수법의 사례를 들어서 고려 초기에는 이미 사적인 복수가 금지되어 있었음을 말한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국가차원에서 이용된 사회적인 복수에 대한 관용은 곧 제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한것 처럼 이런 복수관은 중국에서 변화된 율령과 복수에 대한 인식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은 율령을 받아들이고 수차례 편찬 및 조율하면서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북주 무제의 복수에 대한 금령입니다. 신라의 율령은 당의 영휘 정관 율령에 영향을 받았는데 당의 시대가 되면 율령에서 사적인 복수에 대한 금령이 확고해 졌음을 알 수 있으므로 신라 중고기에 들어서면 복수에 대한 국가의 제어가 이루어질 것임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검군은 대사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의 사인이었다. 건복 44년의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농작물을 죽였으므로 다음 해 봄부터 여름까지 큰기근이 들었다.…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모의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검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근랑의 화랑도에 이름을 올리고 수행하였다.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사인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어 나갈 것이다 하여 검군을 불렀다. 검군이 자기를 모살할 계획을 알았으므로 근랑에게 말하기를 오늘이후에는 서로 다시 만날 수 없다 하였다.…근랑이 어찌 관청에 알리지 않는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뭇사람으로 하여금 죄에빠지게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하니 저들이 굽고 나는 곧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가는 것은 대장부가할 일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모임 장소에 갔다.…검군이 음식에 독이 들었음을 알고도 먹고 죽었다.
검군은 7세기 후반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해하려 하는 음모에 대하여 복수하기 보다는 초연히 저항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사가는 검군의 의로움을 기록하였으며 이런 저항에 대하여 긍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7세기의 검군 그리고 그 이후의 저자가 살던 시기에 더이상 복수의 논리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 됩니다.
이번에는 삼국유사에 실린 혜통의 기사입니다.
용이 이미 정공에게 원한을 갚고 기장산으로 가서 곰 신이 되었다. 악독함이 더욱 심해져 민이 많은 해를 입었다. 혜통이 산에 들어가 용을 달래고 불살계를 주니 마침내 재앙이 잠잠해졌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에 종기가 나서 혜통에게 보기를 청했다. 그가 와서 주문을 외우니 곧 나았다. 이에 아뢰
기를,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이었을 때 신충의 죄를 잘못 판결하여 노비로 삼았으니 그가 원한을 품어 보복할 마음을 품었습니다. 지금 이 등창도 신충의 저주 때문이니 마땅히 그를 위해 가람을 짓고 명복을 빌어 풀어야 합니다 했다
혜통은 용과 신충에 대해서 복수보다는 종교적인 방법으로의 승화를 제안하고 실행합니다.
그리고 이는 신통력이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지요. 7세기 이후 불교의 교리 연구가 활발해 지자 점차 고대사회의 복수관은 종교적으로 해결하는 불교식 해결법이 확산되엇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복수대신에 용서와 관용을 배푸는 사례는 많습니다. 성덕왕대의 수로부인 설화, 헌강왕대의 처용설화 등등이 대표적이며 이는 신라 하대에 들어서 신라인들은 복수대신에 관용과 용서를 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복수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 그리고 국가차원의 이용과 변화를 살펴본 논문이었습니다.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