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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심산 김창숙 선생의 빈소를 방문해 분향하고 있는 박정희 의장.
↑ 자신의 84년 인생과 자식들까지 조국에 바친 심산 김창숙.
↑ 공판장으로 가는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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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숙 사건의 재판을 보도한 기사. (사진=시대의 창 제공)
김창숙은 항소를 포기하고, 대전교도소로 이감해 길고 긴 감옥살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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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을 맞아 외세에 맞서 민족분단의 저지에 나서다
↑ 김창숙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규관대학에서 유림들과 함께 선 심산 (맨 앞에 앉아 계신 분). 그 뒤가 아놀드 미 군정장관.
일본이 항복한 그 다음날 김창숙은 청년들의 부축을 받으며 옥문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일가친척 등 천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다들 집에 모여 술잔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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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암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된 김창숙 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시대의 창 제공)
◈ 반독재 기치 아래 이승만과 정면승부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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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3선 연임까지 강행하자 심산이 나섰다.
그는 공개적으로 각료 중 간신배에 해당하는 몇몇을 해임시키고, 민의 조작의 주동 집단인 자유당을 해체하며,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김창숙 아니면 감히 하기 어려운 제언이었다.
그 대답은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과 유도회에서 쫒아내는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갖가지 공작을 벌여 일제 때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낸 친일파 윤우경이 중심이 된 자유당 정치 브로커들이 유도회를 장악하도록 했다.
성균관대 총장 자리는 김창숙을 몰아내고 역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이선근을 앉혔다.
모든 공직에서 밀려난 김창숙은 서울에서 영업용 택시를 모는 아들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집 한 칸 없어서 여관을 전전하고 병원비를 구하지 못해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권력자들의 도움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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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망명…병상에서 일어나 백범 김구의 한풀이에 나서다
↑ 성균관대학교 교정에 서있는 김창숙 선생의 동상. (사진=시대의 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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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선생이 서거하자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심산상을 제정했다.
↑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여섯 차례 큰 절을 올렸다. (사진=심산사상연구회 제공)
출처 |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408071133050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