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유관순 열사 1902.12.16-1920.09.28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이화학당 시절, 뒷줄 오른쪽 끝
서대문 감옥 수형자 기록표 사진
1. 오광심 지사 1910.03.15-1976.04.07
중국대륙을 누빈 여성광복군
독립운동가 김학규의 부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31년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40년 이후에는 광복군에 입대하여 선전활동 등을 담당했다.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조선혁명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도중, 남편인 김학규를 만나 결혼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 6분처의 대원으로 활동한 오광심 선생과 남편인 김학규 선생, 그리고 서파
부군인 김학규 선생과 함께 광복군 제 3지대에 소속되어, 초모공작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2. 남자현 의사 1872.12.07-1933.08.22
독립군의 어머니.
유언 -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며 혈서 '독립조선독립원'을 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일본 장교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지복영 지사 1920.04.11-2007.04.18
아버지 독립운동가 지청천, 대를 이은 독립운동
1931년 일제의 탄압으로 근우회 해체를 끝으로 여성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후 여성 활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내 항일 비밀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국내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대부분 해외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중국 동북항일유격대, 조선의용군, 한국광복군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여성들은 많은 활동을 벌였다. 지복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군이자 여성 광복군이었다.
1940.09.17 중경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속 선생 모습
서안으로 이동 중인 지복영, 조순옥, 오광심 선생. 그녀들은 이곳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선전 활동에 주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기념사진 속 지복영 선생, 1945.11.03 충징에 있던 청사 건물 앞에서.
아버지 지청천 장군
4. 최용신 선생 1909.08.12-1935.01.23
심훈 소설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
여성 농촌 운동가로 경기 수원군(현 화성시) 샘골에서 농촌교육을 시작.
1929 협성신학교 시절 앞줄 오른쪽
한글보급, 농촌봉사대와 최용신 선생(1930)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천곡학원 학생들과 교사들
선생의 유언. 그를 간호하던 안홍팔에게 선생이 구술한 것. 1934.01.26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여하여 주십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십 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5. 정정화 선생 1900.08.30-1991.11.02
한말의 독립운동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밀사 역할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정정화 선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
김의한, 정정화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
3.1 유치원 추계 개학입학 기념사진 (1941.10.10) 뒷줄 맨 오른쪽 정정화 선생.
한국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1940.06.17)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6. 박차정 의사 1910.05.07-1944.05.27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동래지부 회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반이학생운동으로 확대되도록 기여,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해 부녀자들의 민조의식 고취와 대동단결 주도.
동래일신여학교 시절의 박차정 선생
박차정 의사와 김원봉 선생 결혼 기념사진
병으로 가석방된 박차정 의사는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31년 의열단장을 지낸 김원봉과 결혼,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 김원봉과 함께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제 1기 여자교관으로 활약, 사관생도 양성에 주력.
1939년 2월 중국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어깨에 총상을 입은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
그 후유증으로 해방을 1년 ㄴ잠긴 1944년 5월 27일 35세의 나이로 순국.
해방 이후 박차정 의사의 유골은 남편의 고향인 경남 밀양시 감전동 뒷산으로 이장되어 현재까지 이름.
7. 이애라 (이애일라, 이심숙) 선생 1898.01.07-1922.09.04
교육자. 독립운동가. 이규갑의 아내. 이화학당, 공주 영명학교 교사였다.
평양에서 3.1 운동 만세 시위에 참가, 구류되었다.
수원, 공주, 아산 등 지방교회를 순회, 비밀리에 부인회를 조직한 후 체포.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이다."
어린 딸아이를 업고 친정 형님 집으로 가던 도중에 일본 헌병을 맞닥뜨렸는데 등에 업은 아기를 빼앗겼다네요.
백일이 갓 지난 상태였는데 일본 헌병은 아기를 빼앗아 길에 내동댕이쳐서 즉사케하고 선생을 체포,
이애라 선생은 아기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피체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답니다.
8. 권기옥 의사 1901.01.11-1988.04.19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평양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등으로 활약, 1920년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
중국군에서 10여 년간 복무하면서 항일활동 지속.
공식적인 비행 자격증으로 따지면 1927년 1월 28일 일본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 자격증을 딴 박경원이 먼저.
단 공인된 자격증은 없었지만 1925년 2월 28일 윈난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20일 중화민국 본부 '항공사 부비행사' 임명장을 받은 권기옥이 전투기지만 비행사 자격증에서는 우선이다.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윈난 항공학교에서 첫 단독비행 성공 후 찍은 기념사진
1935년 중국 공군에서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중. 왼쪽 두 번째.
난징을 방문한 시동생 이상화 시인(왼쪽)과 남편 이상정(오른쪽)의 어깨에 팔을 걸친 권기옥
10. 어윤희 선생 1881.06.20-1961.11.18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
개성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계속 독립운동을 함.
광복 후에는 유린 보육원을 설립하고 교회 장로로 일하는 등 사회사업에 힘썼다.
선생이 설립한 유린양육원 어린이들과 함께.
11. 윤희순 의사 1860. 06.25-1935.08.01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으로 출정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등을 창작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진력하였고,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도 적극 앞장섰다.
선생이 지은 의병 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사본
12. 김마리아 열사 1892.06.18-1944.03.13
한국의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신여학교 교원을 지냈다.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 체포.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상하이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다.
13. 조신성 선생 1873-1953.05.05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안창호와 함께 평양 진명여학교를 운영.
이화학당 기숙사 사감을 지내고 평양에서 진명여학교를 창설.
신민회에 참여,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면서 헌납금을 임시 정부에 보내며 독립운동가를 피신시키는 등 적극적인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
14. 박자혜 열사 1895.12.11-1943.10.16
간호사. 독립운동단체 간우회 설립자.
궁녀에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부친은 중인 출신 박원순.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부인의 소개로 만남.
15. 곽낙원 열사 1859.02.26-1939.04.26
아들 김구.
앞줄 가운데 곽낙원 여사, 뒷줄 가운데 김구 선생.
16. 차경신 선생 1892-1978.09.28
원산 진성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간호대 및 의주 청년단을 조직해 독립운동 전개.
이후 대한애국부인청년단연합 대표로서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대구형무소에서 나온 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들과.
19. 방순희 선생 1904.01.30-1979.05.04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성 의원.
한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을 지냈다. 여성들을 독립운동에 참가시키는 데 힘을 쏟았으며 국내외에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여성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제 34차 임시의정원 의원 일동 둘째 줄 가운데 1942.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1940.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주역들. 맨오른쪽. 1943.
방순희 선생이 연설한 자유한인대회장 광경. 1943
18. 남동순 열사 1903-2010.04.03
3.1 여성동지회 회장.
6살 때 유관순 열사를 만나 소꿉친구로 자랐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19년 열사와 함께 천안에서 3.1만세 운동을 벌였다가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 박우말례 1902.03.13-1986.12.07
1919년 3월 10일, 수피아여학교 재학시 반장이었던 박우말례 선생은 다른 반장, 여교사와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학교 앞 장터에서 깃발을 나눠주면서 만세를 외쳤다.
20. 윤천녀 열사 1908.05.29-1967.06.25
함경북도 회령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사진을 못찾았어요.
21. 박옥련 1914.12.12-2004.11.21
1928.11 소녀회
22. 안경신 의사 1888년 평안남도 대동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 정부의 국내기관이었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
일경의 감시와 체포가 심해지자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대한광복군 총영의 활동에 가담.
더 이상 평화적인 외교적 청원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각하고 무력적인 응징만이 가능하다고 생각.
여성이지만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과감하게 폭탄거사에 뛰어들었다.
동지들과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를 폭파시킴으로써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 외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