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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치긴 왕가에 대한 간략한 정리 세번째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226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7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8/25 11: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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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두서없이 써내려 가는 글이라 그런지 저도 정신이 없네요.
 
이번에는 경제적 기반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옷치긴 왕가를 비릇한 동방 왕가들의 경제적 기반은 첫째로 징기스칸 때에 분봉된 영지와 부민들이 있고 두번째로 우구데이 칸이 1236년 분봉한 한지 즉 한족의 땅에 대한 경제권과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정벌하며 분봉한 땅에 대한 경제권 그러니까 화북과 강남의 식읍으로 부터 걷어들이는 강남호초江南戶鈔와 오호사료五戶絲料가 있으며, 세번째로 속령의 부민들로 부터 부세와 요역을 네번째로 새 대칸이 즉위할 시 훈공에 따라 일족과 공신에게 나누어주는 정기적, 비 정기적인 상여금을 들수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옷치긴이 분봉 받은 부민은 동 서 올루스를 통틀어 제일 많았습니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 상속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말자 상속 원칙에 따르자면 모친의 재산도 함께 소유하도록 되어 있지요.
 
이러한 옷치긴의 영지에 사는 부민들은 몽골인과 거란, 여진, 고려, 한인, 키르키즈인등 여러 민족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는 여진인들 입니다, 이 들은 백두산 서쪽과 송화강 상류와 중류, 목단강과 수분강 등에 등에 사는 여러 여진인들의 부락을 가리키는 생여진과 동북 송화강 및 동강과 그 주변의 산에 사는 여진을 가르키는 수달달인으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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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은 목농 뿐만 아니라 수로, 어업, 수렵, 상업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지리적으로 보자면 흥안령 서쪽의 초원지대는 주로 몽골인들이 유목민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고 흥안령 동쪽은 산림이 우거진 지역으로 원 나라때에 여진 수달달 혹은 수달달 여진이라 불리게되는 수달달인들이 주로 수렵과 보조적으로 어업과 유목을 병행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흑룡강 연안과 사할린 연해에는 당연하지만 어업이 중심이었습니다, 특히나 흑룡강 북쪽 지역에는 큰 강을 따라 어업과 수렵이 경제의 중심이 되었지요, 반면 요동지역과 요하 지역에서 압록강 서쪽에 이르는 지역은 일정한 강수량과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한족과 거란족, 여진족이 살았고 원나라가 관심을 가지기 이전부터 일찍이 농업이 매우 성행하고 발전한 지역이었지요.
 
송화강 유역의 여진인들 역시 처음에는 유목 생활을 영위했지만 큰 강을 끼고 형성된 비옥한 토지에 정착하여 밭농사를 짓는 정착 생활에 점차 매진하게 됩니다, 물론 유목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마치 프라이드 반 양념 반 처럼 혼재된 경제 생활을 영위했는데 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만주의 곡창이라 불릴정도로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처럼 옷치긴 왕가의 경제 생활은 유목 생활을 중시했던 다른 왕가들과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렇게 유목, 어로, 수렵이 혼재되어있는 경제구조는 이 곳 동북 만주 지역이 유목민들의 국가가 끊임없이 일어설수 있게 만드는 구조적인 조건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위에 세워진 옷치긴 왕가는 다른 왕가와는 다른 독립적 성향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또한 옷치긴 왕가는 왕가의 순수한 사속민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전문 인력들로서 다양한 공방에 소속되어 노역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왕가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중 하나인 식읍이 있는데 이 것은 다음 글에 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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