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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에서 아편은 제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서유럽 그리고 미국에서의 아편은 오늘날 아스피린보다 더 흔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의약품에는 아편이 들어갔으며, 특히 새롭게 특허를 받은 약품에는 예외없이 아편 성분이 들어갔다. 그리고 가짜 의사들이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는 치료약의 가장 중요한 성분이 아편이었다. 당시에 사용되던 아편의 양은 한 마디로 경악스러운 분량이었으며 세계 전체가 아편에 취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31~1859년 영국의 아편 소비량은 연간 2.4%의 비율로 성장했다. 수입되는 양은 1830녀에 약 4만 1,300 킬로그램에서 1860년에는 12만 7,000 킬로그램으로 세 배나 증가했다. 그리고 가공되어 재수출된 아편의 양은 같은 기간에 1만 8,600 킬로그램에서 6만 8,500 킬로그램으로 늘어났고, 그중 절반 이상이 미국으로 팔려나갔다. 영국의 아편 주요 수입국은 놀랍게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가 아니라 터키였는데, 그 이유는 보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은 4~6%의 낮은 모르핀 함유량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터키산 아편은 10~13%에 이르고 있었다. 게다가 터키는 영국의 거대한 면제품 시장으로서 영국산 면제품이 터키산 옥수수, 비단, 양모, 스펀지, 아편 등과 거래되고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1827~1869녀에 영국으로 수입된 아편의 80~90%가 터키산이었다.
아편의 초기 교역로는 프랑스와 독일, 지브롤터, 몰타,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비단,향료의 교역로를 따랐지만 오래지 않아 새로운 교역로가 개발되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는 아편을 선적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역할은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 역시 아편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러나 1850년에 이르자 대부분의 아편은 환적과 관세 없이 영국 배들을 통해 터키로부터 직접 수송되었다.
영국의 리버풀, 도버, 브리스틀은 모두 아편을 취급하는 항구도시였으며 교역의 중추 역할을 한 곳은 런던이었다. 런던의 아편 사업은 수입상들의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5년 카르텔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수입상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경매를 통한 매입과 개인적인 거래망을 구축해 아편을 유통시켰다.
아편 거래의 중심지는 런던의 차(茶) 도매상 근처였으며, 이곳에서 전체 거래의 90%가 이루어졌다. 매매 계약은 런던 거래소 근처의 개러웨이(Garraway)라는 커피하우스에서 경매를 통한 호가 구매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경매는 입찰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사람에게 물건이 낙찰되었으며 격주로 이루어졌다. 100명의 구매자들과 중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침 10시 30분에 입찰이 시작되어 하루종일 진행되었다. 그리고 가끔씩 대형 약제회사나 런던의 약 30개 독립 중개인들과 같은 런던 약품 도매상사들 사이에서도 아편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들의 거래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개러웨이의 모습
우선, 대형 약제회사의 약제사들이 토요일에 필요한 만큼의 물건양을 중개인들에게 주문을 하면 중개인들이 다음 화요일까지 약제사들이 원하는 견본을 제출한다. 그러면 중개인들이 보내온 아편 견본을 약제회사의 구매위원회가 직접 검사하고 상태에 따라 주문을 결정한다. 주문이 결정되면 보세창고에 보관된 아편은 세관 통관 이전에 출고되었다.
출처 | http://blog.daum.net/bluros/662622 상기 푸른 장미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