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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남부에서 아편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중세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거의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아편의 끈질긴 생명력은 사람들의 기억 제일 아래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편은 다시 사람들의 기억 밖으로 나올 기회가 생겼다.
아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은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아랍인들과 온몸으로 부딪혔던 십자군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선물은 아랍인들로부터 얻은 아편에 대한 지식이었다.
십자군 기사들에게 아편은 다른 마약류와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기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경험과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전설을 만들어냈다. 해시시를 복용하고 사자첨럼 용맹해진 페르시아 군대, 지쳐 쓰러져가던 타타르의 사신과 말들이 이 신비의 물질을 복용하고 되살아나는 모습, 아편의 힘으로 강철같이 강력해진 터키 전사들에 관한 무용담 등이 발전하면서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이와 더불어 약용식물이나 마시는 약의 마법적인 효력에 관한 수문들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해시시
시간이 지나면서 아랍 세계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아편 교역은 세계적 상인인 베네치아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유럽의 교역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아편과 그에 대한 지식들을 아랍 세계로부터 들여와 유럽 사회에 전파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찾아 항해에 나섰을 때, 아편은 그가 가져올 물품들 중에 하나였지만 별로 중요 상품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마젤란이나 바스코 다 가마 등도 다른 물품에 추가해서 아편이 있으면 한번 찾아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바스코 다 가마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포르투갈인들은 베네치아인들을 대신하는 아편 교역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남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발견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인도의 무굴제국 황제들은 부족한 세금을 메우기 위해 양귀비 재배를 장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인도에서는 많은 양의 아편이 유통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새롭게 발견된 항로를 이용하는 포르투갈인들은 아랍 세계를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직접 아편을 구할 수 있었으며, 아편이 화물 목록의 중요한 위치에 오르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아편이 기분전환용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의약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6세기에 이르자 의약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비록 상류계급 출신들에게 국한되는 현상이었지만 아편의 광범위한 사용은 많은 중독자들을 만들어냈다. 어떤 중독자들은 하루에 40그램이나 되는 아편을 복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순수한 아편이라기보다는 포도주 등과 혼합한 양으로 짐작된다. 하루에 이 정도의 아편을 복용하고 계속 살아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아편이 발휘하는 경이로운 특성에 힘입어 의학적으로도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옮긴이 주- 해시시는 대마의 꽃대의 수지를 가공한 것이고, 아편은 양귀비의 꼬투리의 수액을 가공한 것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bluros 푸른 장미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