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485
요로코롬 중국인 최초로 타임지 표지 모델이 되었답니다. 상관은 없지만 한국인 최초로 플레이보이지 표지모델이 된 사람은 이승희였던가요..-.-
이번화는 중국의 패권을 놓고 장작림과 대결했던 직군 군벌의 실세이자 한때 "최강의 남자"라 불리었던 오패부(1874~1939)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패부도 장작림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나이입니다. 태반이 제 이름자도 못쓰던 그 때 그 시절 군벌들(연대장급이상 87%가 까막눈이었다고 함)중에서 드물게 뛰어난 학식과 문무를 겸비해 명성이 높았습니다. 물론 봉건기준에서의 얘기지만요. 드라마틱할만큼 장작림과는 모든 면에서 대비되었지만 장작림에게 패하고 장개석의 북벌군에게 몰락한 이후 일본에게 강제로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당하죠. 삼국지와 비교한다면 원세개는 동탁, 장작림이 조조, 오패부는 원소쯤 될지도...
그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제 이름 석자도 쓸 줄 몰랐던 장작림과 달리 문장가로도 뛰어났고 소시적에 과거시험에도 응시하여 童試에 합격하여 "수재"가 됩니다.(우리의 생원에 해당) 이 시험에 합격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데 중국의 과거시험은 조선의 과거시험보다 훨씬 까다롭고 합격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오패부는 대단한 인물이었죠.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청국군이 패배하고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관리가 아닌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원세개가 운영하는 북양무비학당에 들어갑니다. 졸업후 다시 보정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죠. 그리고 1906년 조곤의 부하가 되어 북양육군 제3진 포병 제3연대 제1대대의 장교가 됩니다. 한마디로 정통 엘리트 코스에 원세개 직속의 오리지날 북양군벌로서, 날건달에 동네 꼬봉들 덱구 권모술수 하나로 산도적에서 만주의 제왕이 된 장작림과는 뼛속부터가 철저하게 다르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임시대총통이 된 원세개는 손문의 혁명당을 탄압하고 지가 직접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펼칩니다. 전국에서 여기에 반발하여 원세개를 토벌하기 위한 토원군이 일어나(이른바 "호국전쟁") 전국이 내전상황에 빠지죠. 오패부는 호국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이름을 떨치고 여단장까지 올라갑니다.
1910년대 북양군의 모습. ※ 출처 : 위키백과1916년
원세개가 죽자 북양군은 둘로 분열됩니다. 단기서의 환계와 풍국장의 직계로 말이죠. 조선시대때 한양 동쪽에 산다고 동인, 서쪽에 산다고 서인이라고 했던 것처럼 양측 대빵들인 단기서가 안휘성 출신이라 환계(또는 안휘계), 풍국장이 직예성 출신이라 직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아래위로 철저하게 학연, 지연으로 똘똘 뭉친 봉건관계였습니다.
1919년에 풍국장이 죽자 오패부의 상사인 직예독군(독군 : 성의 최고 군사령관) 조곤이 직예파의 대빵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조곤은 허수아비였고 오패부가 실권을 쥐고 있었죠.
이 양반이 조곤(1862~1938). 당시에는 저런 수염이 유행이었나 봅니다...--; 잘 관리하려면 수시로 신경써야 할듯... 왠지 엑셀사가의 카파푸박사가 연상되는군요.(요즘 나오나?) 참고로 장작림과는 혼인정책으로 사돈지간이었음.
환계의 우두머리이자 국무총리였던 단기서는 "중국도 국격 상승을 위해 1차대전에 참전하자"라고 주장하고 허수아비 대총통 서세창을 압박해 1917년 8월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합니다. 물론 유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중국이 참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네 산동에 주둔한 독, 오군에 대해서도 총 한발 쏜 일은 없었으니 말짱 헛소리였죠.
단기서의 속셈은 환계가 직계에 비해 군사력이 뒤지기 때문에(죄다 계급만 높지 병력은 없었음) 이를 명분삼아 새로운 사병군대를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막대한 지원하에 소위 "참전군"을 편성합니다. 약 1억45백만엔의 차관을 받아 총 3개 사단과 4개 혼성여단이 편성됩니다.(병력은 2만정도) 그러나 일본군 교관에게 훈련되었고 일본군 장비로 무장했으며 군마 한필까지도 죄다 일본산인, 그야말로 사람만 중국인이지 일본군이나 다름없었죠. 더 웃기는 것은 1차대전 참전을 명분으로 했음에도 정작 참전군이 편성된 것은 전쟁 다 끝난 뒤였습니다. 따라서 도처에서 당장 해체하라, 라는 반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였죠.
단기서는 반발을 한칼에 씹어버리고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이름을 바꾼 다음 "남벌"을 하겠다고 선포합니다. 만주의 제왕인 장작림에게도 관내로 들어와 남벌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자 원세개만큼이나 이 꿈 많은 사내는 좋아라하며 주력인 27,28,29 3개사단과 1개 혼성여단 5만의 병력으로 북경으로 들어옵니다. 환계와 봉계가 힘을 합치자 직계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이 둘의 사이는 금새 나빠집니다. 단기서의 부하였던 서수쟁(당시 남벌군 부사령관)이 봉군에게 주기로 한 돈을 멋대로 가로채고 자기 개인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기 때문이죠. 장작림의 봉군은 원래 500만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서수쟁이 이중에 320만원을 가로채고 장작림에게는 180만원만 줍니다. 게다가 장작림의 영역인 만주에서도 토비들을 모아 세력을 야금야금 잠식하니 우리의 장작림이 그걸 보고 있을리가 없죠. 당황한 단기서가 장작림 마음을 돌리려고 군비 100만원과 3개 혼성여단을 봉군으로 편입시켜 일단 무마합니다. 그러나 앙심을 품은 서수쟁이 장작림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양자는 완전히 결렬됩니다.
한편, 호북을 기반으로 호남성을 공략중이던 오패부는 단기서의 명령따위 완전히 씹어버리고 손문의 광동정부와 멋대로 휴전합니다. 60만원의 뒷돈도 챙기고 "무력통일 반대, Love & Peace"를 외치며 낙양으로 진군합니다. 즉 북경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환계와 싸우겠다는 뜻이었죠. 다른 직계군벌인 왕승빈과 소요남도 북경 아래 보정으로 가서 보스인 조곤과 합류합니다. 오패부는 천진에서 장작림과 만나 반환계 연합전선을 결성합니다. 장작림도 서수쟁한테 죽다 살아난 처지라 이를 북북 갈고 있었으니 좋다고 손을 잡았죠.
상황이 이지경이 되자 단기서도 결국 1920년 7월 8일 북경에서 "직군 토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14일 총공격명령을 내림으로서 직환전쟁이 발발합니다. 양측의 병력은 환군이 8개 사단, 5개 혼성여단이었고 직군은 오패부의 제3사단을 선봉으로 1개 사단, 3개 혼성여단으로 숫적으로는 직군이 훨씬 열세였습니다. 따라서 초반에는 환군이 경한철도를 따라 공격해 직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직군을 몰아붙입니다. 그런데 16일에 장작림의 봉군이 환군의 뒤를 범하자 환군은 순식간에 붕괴됩니다. 직군 최강 부대인 오패부의 제3사단은 환군 제15사단을 격파한 다음 곡동풍이 지휘하는 환군 제1사단까지 포위 섬멸시켜 곡동풍을 포로로 합니다. 17일에 서수쟁이 북경으로 도주하고 다음날 단기서가 사실상 백기를 듬으로서 직환전쟁은 4일도 안되어 환계측의 KO패로 끝나죠. 직접적으로는 서수쟁의 지나친 욕심이 단기서의 몰락을 불러온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단기서 본인이 일본에 매달려 매국노 행세를 했기에 여론이 악화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직환전쟁의 승리로 단기서가 물러나고 근운붕이 국무총리가 됩니다. 물론 실세는 봉군의 장작림과 직군의 조곤이었죠. 이때만 해도 장작림은 오패부따위는 조곤의 일개 꼬붕쯤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오패부는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며 직예, 하남을 비롯해 호북, 호남성까지 손쉽게 장악하여 양호(호남북) 순열사가 되어 직계의 실세임을 명확하게 보여주자 장작림은 당황하죠. 이는 계급상 자신과 대등한 관계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장작림 역시 근운붕을 협박해 열하성을 장악하여 세력을 확장하죠. 이렇듯 양자 모두 꿈많고 욕심 많은 사내들이니 금새 대립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친일 단기서 내각을 지지하다 막상 개네들이 박살나는 꼴을 눈치만 보다 죽쒀 개준 꼴이 된 일본은 장작림을 중국의 차기 주자로 생각하고 적극 지원합니다. 오패부는 반일이면서 영, 미의 지원을 받고 있었죠. 북경정권이 일본에게 차관을 얻자 오패부는 장작림의 매국행위를 적극 규탄하고 국내 여론을 자기편으로 합니다. 영, 미 역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장작림을 압박합니다. 이는 장작림에게 매우 치명적이었죠. 또 한가지, 이 시절 최대의 안건은 바로 "돈"에 있었는데 군비 배분에서도 서로 니가 더 많이 받는다면서 불만이 생깁니다. 이러니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죠.
정작 오패부의 보스인 조곤은 자기 근거지인 보정에 눌러앉아 양측의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작림을 건드려 괜히 쓸데없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오패부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니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1922년 4월 28일 제1차 직봉전쟁이 발발합니다. 숫적으로는 봉군이 우세했지만 마구잡이로 긁어모아 머릿수만 채운지라 장비와 훈련, 사기에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장작상, 장경혜 등 산도적 출신들이 대부분인 지휘관들의 무능함은 말할 것도 없었죠. 일부는 반란을 일으켜 총부리를 아군에게 돌리기까지 합니다. 오패부는 1개 여단을 봉군의 배후를 급습케 하여 장경혜를 격파하고 퇴각중인 봉군을 맹추격합니다. 5월 4일 장작림은 전면 퇴각을 명령하지만 봉군은 완전히 와해직전까지 몰립니다. 봉군 총사령부가 있는 천진 군량성에서는 2개 여단이 총 한발 쏘지 않고 투항합니다. 단지 장학량, 곽송령이 지휘하는 제3, 4여단만 제대로 싸웠죠. 이들은 신식훈련을 받은 봉군 최강부대였습니다. 오패부는 산해관까지 추격하지만 산해관을 넘지는 않습니다. 이는 일본과의 직접 대결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죠. 또한 남쪽에서 손문이 북상중인지라 그쪽도 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