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말 심양에서의 봉군의 행진 퍼레이드,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 >
와신상담하며 철저하게 복수의 칼을 간 장작림은 환계군벌 단기서와 손을 잡았고 또 오패부의 부하인 풍옥상과도 내통합니다. 마지막 황제 부의를 하야시킨 것으로 유명한 풍옥상은 오패부에게 찬밥 신세였는데 좋아라 하며 장작림과 손을 잡습니다.
반면 오패부는 기고만장해진채 보스 조곤을 허수아비 총통에 세우고 남방에 대해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근대화시키고 내실을 기하는 대신 뇌물과 거듭된 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군대 월급도 주지 못해 사기도 최악이었습니다. 또 사면 팔방이 죄다 적이었죠.
1924년 9월 상해 외곽에서 환계 군벌 노영상의 절강성과 직계 군벌 제섭원의 강소성간의 "절강전쟁"이 발발합니다. 이는 제2차 직봉전쟁의 전초전이었죠. 손전방의 협공을 받아 절강전쟁은 노영상의 패배로 끝나고 절강성은 직군에게 점령당하지만, 장작림은 이 기회를 이용해 총공격에 나섭니다. 2년간 절치부심하여 모은 모든 것을 걸고 9월 13일 산해관으로 진격합니다. 병력은 4개 사단, 13개 여단 15만명에 달했습니다. 오패부 역시 토벌령을 선포하고 6개성 11개 사단, 1개 독립연대, 11개 여단, 항공기 70대 등 총 25만명을 동원합니다. 장학량, 곽송령의 제1군이 산해관으로, 이경림, 장종창의 제2군이 열하로 파죽지세로 진격합니다.
오패부는 장작림의 남하에 대비해 산해관 일대에 벙커와 요새를 곳곳에 배치하여 봉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공군의 지원을 가지고도 직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오패부는 전방에서 봉군을 붙잡아두는 동안 해군으로 우회해 봉군의 후방에 상륙하여 협공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곽송령이 구문구를 기습 점령하여 산해관의 직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오패부는 병력 상당수가 남쪽에 붙잡혀 있는데다 돈이 없어 철도로 전방에 증원군을 보내지 못합니다. 게다가 10월 23일 증원부대로 가던 풍옥상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장악하고 오패부를 "역적"으로 선포합니다. 이는 결정타였죠. 오패부는 1만의 병력으로 북경으로 돌아가다가 풍옥상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하고 소수의 잔존부대만 가지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도주하죠. 이로서 제2차 직봉전쟁은 장작림의 완전한 승리가 됩니다.
승자가 된 그는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대군을 거느리고 북경으로 진군합니다. 북경은 풍옥상이 장악했지만 세력에서 도저히 장작림에 비할 바가 못 되었죠. 풍옥상은 북경을 버리고 서쪽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작림은 여세를 몰아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야심으로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노영상, 장종창이 선봉으로 10만의 병력으로 산동성을 장악하고 이어 상해와 남경, 안휘성까지 장악합니다. 그야말로 중국의 노란자위만을 골라서 차지합니다.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서 그야말로 최대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고만장해진 봉군 지휘관들끼리 서로 질투와 경쟁이 심화되고 특히 장종창의 안하무인적인 통치로 주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점점 높아집니다. 장작림과 마찬가지로 비적 출신인 그는 거친 군벌들중에서도 그야말로 꼴통중의 상꼴통이었습니다. 첩이 몇명인지 모르고,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며, 병사들이 몇명인지 모른다하여 "삼불장군"이라 불린 그와 그의 부하들은 돈을 물쓰듯 쓰고 온갖 행패에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결국 봉군은 손전방의 5개성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싸움한번 제대로 못한채 3개 사단이 괴멸되어 쫓겨가죠.
더욱이 25년 11월 23일 곽송령의 반란은 장작림에게 치명타였습니다. 마적 출신으로 장작림과 형님 동생하는 "녹림파"가 대다수였던 봉군에서 곽송령은 중국 육군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습니다. 장학량과 의형제를 맺었고 제2차 직봉전쟁전에는 봉군 근대화를 주도했죠. 곽송령은 민족주의가 굉장히 강한 인물이었는데 봉군내 심화된 암투에다 장작림이 일본의 원조를 받기 위해 온갖 매국적 밀약을 약속한 것을 알고 "장작림 하야와 장학량 옹호"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곽송령의 제3방면군(3개군단 7만명)은 봉군 최강 부대였기에 압도적으로 장작림군을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이 개입해 곽군을 공격하고 장작림군을 지원함으로서 곽송령은 한달만에 몰락하죠. 이 과정에서도 장작림은 일본의 협조를 얻으려고 온갖 이권을 약속합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관동군의 분개를 사 결국 폭사당하게 됩니다.
아무튼 곽송령의 반란을 기회로 풍옥상이 북경, 천진을 공격해 장악하자 장작림은 곧장 풍옥상을 공격하는데 철천지 원수인 오패부와 손을 잡습니다. 당시 오패부는 한구에서 장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부하인 손전방의 추대를 받아 14개성 연합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뭐 말이 그렇지 손전방은 오패부 몰락후 사실상 딴집 살림 차린 상태였고 오패부의 세력권은 하남, 호북, 직예성 정도였습니다.
풍옥상은 이들 장작림-오패부-염석산 3개 세력의 협공을 받아 3개월만에 패퇴하고 산간오지인 감숙성으로 철수합니다. 장작림은 다시 북경을 장악하죠. 오패부는 더이상 장작림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천하의 패왕은 장작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최대의 적이 나타납니다. 바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었죠.
1926년 7월 장개석은 손문의 유지를 이어 10만의 병력으로 북벌을 시작합니다. 광서군벌인 이종인에다 호남군벌 당생지, 산서군벌 염석산, 서북군벌 풍옥상도 장개석에게 가세합니다. 장작림은 오패부, 손전방과 손을 잡고 여기에 맞서죠.
< 북벌직전의 상황.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 >
병력면에서는 오패부의 직군이 20만, 손전방군이 20만, 장작림이 40만으로 도합 80만에 달하여 북벌군에 비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합지졸에다 사기도 낮았고 바로 어제까지 치고박고 싸운 관계에서 공동의 적땜시 마지못해 손을 잡은 것뿐 제대로 협조가 될리가 없었습니다. 오패부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는데 손전방은 나 몰라라 했고 오패부 자신도 장작림의 지원 의사를 거부합니다. 도와준다는 핑계로 장작림이 영토를 차지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죠. 되려 "우리는 도움 필요 없으니 해군으로 광동성을 직접 공략하라"고 합니다. 서로 순망치한의 관계임에도 이런 것이 이들의 사정이었죠. 10월 10일 오패부의 심장부인 무창을 함락시킴으로서 오패부는 패망합니다.
뒤이어 11월에는 구강, 남창으로 진격해 손전방군을 대파합니다. 이렇게 되자 장작림과 손전방은 손을 잡고 소위 "안국군"을 결성하고 장작림이 안국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27년 2월에는 상해 외곽까지 북벌군이 진격했고 3월에 장종창-손전방 연합군을 격파하고 상해, 남경을 점령합니다. 또 풍옥상의 국민군도 낙양을 점령하고 당생지의 북벌군과 합류합니다. 염석산 역시 부작의를 선봉으로 북경 남쪽에 있는 탁주를 점령하고 북경을 위협합니다.
연패당하는 상황에서 동3성으로 철수할 것을 고민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차마 선택할 수 없었던 장작림은 6월 18일 북경에서 스스로 대원수직에 오른 다음 최후 결전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오패부와 마찬가지로 무리한 영토 확장과 거듭된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지경이 되었고(특히 군비를 마구잡이로 낭비한 장종창때문에) 부하들의 봉급조차 몇달채 체불된 상황이다보니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합니다. 반면 광주와 상해의 자본가들의 지지를 받는 장개석은 어느 군벌보다도 월등한 재정능력을 자랑했죠. 군벌시대의 전쟁은 철저하게 재원 능력에 달려 있었고 병사들은 무조건 돈 많은 쪽에 붙었습니다.
27년 4월 7일 장개석은 총공격명령을 내렸고 철도를 따라 북경을 향해 거침없이 북진합니다. 주력인 장개석의 제1집단군이 산동성을 공격하자 장작림은 최정예 부대를 파견해 장개석을 막으려 했으나 산동성을 장악하고 있던 장종창은 자기 세력이 줄어들까 싶어서 결사 반대했고 이때문에 봉군은 대패를 합니다. 북경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휘관들은 전투 중지와 퇴각을 건의했고 5월 30일 결국 장작림은 관내로 총퇴각키로 결정합니다.
일본 요시자와 공사가 장작림에게 매국적 협약을 승인한다면 북벌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제의하지만 장작림은 일언지하에 거부합니다. 더이상 일본의 요구를 듣는 것은 설령 북벌군을 격퇴해도 결국 일본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에 불과했고 이미 장개석에게 굴복하는 댓가로 동3성의 통치만은 인정받기로 밀약했기 때문이었죠.
격분한 일본 관동군은 열차타고 봉천으로 돌아오는 장작림을 황고둔역을 지나 삼동교에서 폭사시킵니다. 6월 4일 새벽 5시였죠. 장작림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지만 결국 사망합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어이없는 몰락이었죠.
장작림이 죽은 뒤 관동군은 장작림의 총참모장이자 자기들에게 보다 고분고분한 양우정으로 갈아치울 계획이었으나 재빨리 돌아온 장학량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서 그들의 음모는 만주사변때까지 늦춰집니다. 장학량은 동북역치를 선언함으로서 장개석에게 투항합니다. 그러나 이후 중원대전에서 장학량이 북경으로 진출한 사이에 일본 관동군은 결국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장학량은 모든 지반을 빼앗긴채 먼 남쪽 나라에서 모택동과의 전쟁에 투입됨으로서 장작림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 군벌시기 군인들의 모습, 1번이 봉천군인의 모습입니다. 4번 마크는 봉천군이 사용했던 오색기. >※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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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욱이님의 블로그입니다,
이 글이 작성된 시기는 아직 김정일이 건재하던 시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