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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시대 2화 "천하를 얻을뻔한 사나이" 장작림 (上)
게시물ID : history_226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1
조회수 : 122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8/21 09: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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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북양군벌과 양자강이남의 운남, 귀주, 광서 등을 배경으로 한 지방의 남방군벌이죠. 북양군벌은 이홍장과 원세개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데 청말 청일전쟁 이후 만들어진 신식군대인 "신건육군"에서 비롯됩니다. 이 신건육군이 원세개 직속이었죠.(원세개가 이 신건육군을 북양군으로 부르면서 이쪽 출신들을 북양군벌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북양군벌은 원세개사후 풍국장의 직계와 단기서의 환계로 분열됩니다. 후의 대군벌이 되어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오패부, 풍옥상, 손전방은 이 직계 군벌들이죠.

한편, 장작림의 봉계는 엄밀히 말하면 원세개 직속 군벌은 아닙니다. 장작림은 원세개에게 충성하여 후원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제 힘으로 동북3성을 장악했죠.(온갖 비열한 책략과 협박으로)

이번 편은 "산도적에서 대원수로, 천하를 얻을뻔한 사나이" 장작림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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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 권왕 라오우 어록. 이 양반의 엄청난 포스와 카리스마는 주인공 켄시로조차 능가하죠. 이웃열도에서는 이 양반 추모식까지 실제로 열었다는 황당한 소리가...--;;

장개석이전 수많은 군웅들이 난립했던 혼란기. 최강의 패왕은 "토황제"라 불리며 동북3성을 지배했던 만주군벌 장작림입니다. 한때는 북경과 산동에다 남으로는 상해, 남경까지 세력을 뻗치며 거의 중국 전토의 절반을 지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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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색 빗금 위쪽이 죄다 장작림 제국의 최대판도.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 >

장작림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에 칠전팔기입니다. 개뿔도 없는 집구석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한량에 노름꾼으로 노름판에서 "내돈 내놔라"하다가 칼부림당해서 비참한 최후를 당했습니다. 장작림은 어릴적부터 아빠따라 노름판에서 인생을 배웠고 제법 타짜로서의 실력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시적에는 당나귀를 고치며 수의사가 되려고 한 적도 있지만, 이웃마을 사람한테 비적이라고 허위신고 당하는 바람에 동네 쫄따구들 모아서 진짜 수라의 길로 가게 됩니다. 장작상, 장경혜, 이경림, 탕옥린, 오준승 등 대표적인 만주 군벌들 죄다 동네 양아치에서 이 시절에 장작림과 도원결의 맺고 총 한자루로 만주 벌판 누비며 남들 삥 뜯으러 다니죠.(자칭 "녹림대학 마적학과" 출신들이라며 꽤나 자부심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돈 몇푼에 영혼을 쉽게 팔았던 여타 군벌들에 비해 장작림의 봉천군은 서로간의 단결력과 유대감이 상당히 높았습니다.(조폭들의 의리?) 장작림의 리더쉽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청일전쟁 직후에는 청국군에 쫄병으로 들어가 부사관까지 올라갔다가 제대후 고향땅으로 돌아가 동네 치안대장이 되어(그렇게 쓰고 "조폭"이라 읽는다) 100여명의 조직원과 상당한 세를 누립니다. 이때의 무력을 배경으로 관에 편입될 수 있었고 자기 패거리들을 중심으로 구식군대 1개 대대의 대대장이 됩니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며 승진과 함께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강시킵니다. 대총통이 된 원세개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육군중장에 제27사단장이 되었고 그의 부대도 구식 비적단에서 신식육군이 되어 보병 2개여단과 기병 1개여단, 포병 1개 여단, 공병과 수송대대까지 갖추어 만주에서 최강의 무력을 갖춥니다. 병력도 3만에 달해 사단규모를 넘어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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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말 신식화된 기병군인들의 모습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 >

1916년에는 봉천성장 겸 독군(군사령관)이 되었고 라이벌인 풍덕린을 몰아내고 제28사단까지 장악합니다. 그리고 3년만에 권모술수로 길림성과 흑룡강성까지 장악하여 "동북왕"이 됩니다. 이정도까지 되자 그의 야망은 끝없이 커져서 중앙 정계 진출까지 노리게 됩니다. 당시 북경정부는 대총통 서세창은 허수아비였고 단기서의 환계와 풍국장, 조곤의 직계가 정권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1920년 7월 10일 "직환전쟁"이 발발합니다. 전투는 10일만에 끝났고 직계가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정권을 장악합니다. 

환계는 몰락하죠.이 직환전쟁에서 장작림은 직계측의 편을 들었고 부하 장작상과 직속 최정예 제27사단을 선봉으로 약 7만의 병력을 파병하여 중앙에 진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직계 수령인 조곤과는 사돈을 맺습니다. 그러나 양측은 당연히 오월동주의 사이다 보니 금새 대립하게 되죠.

직계의 실세는 조곤이 아닌 오패부였는데, 일자무식에 난폭한 장작림과는 정반대로 청말 과거시험에 합격해 "수재군벌"이라 불린 이 만만찮은 사나이는 장작림을 제거하고 자신이 천하의 패왕이 되려고 합니다. 1922년 4월 3일 전국 11개성의 군벌 500명을 모아서 장작림 토벌을 선포하고 봉군에 대한 공격에 나섭니다. 봉군도 이에 맞서 대군을 남하시킵니다. 

양측의 병력은 직군이 7개사단, 2개 혼성여단 등 약 10만이었고, 봉군은 3개사단, 10개 혼성여단 등 12만명이었습니다. 9일간의 1차 직봉전쟁에서 오패부는 뛰어난 용병술로 봉군을 대파하여 산해관까지 추격합니다. 산도적출신들이 지휘하는 봉군은 전술적으로 매우 무능했고 직군의 강력한 공격에 분쇄됩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쌍방 20만명이 참전했음에도 4~5천명에 불과) 봉군은 3만명이 투항했고 6만명이 싸우지도 않고 도주합니다. 이 시기 쪽수만 많을뿐인 중국 군대의 허약함을 여실하게 보여주죠.

오패부는 산해관까지 진격했으나 일본이 "산해관을 넘지말라"고 협박하자 추격을 단념합니다. 장작림은 한숨 돌릴 수 있었죠. "이기면 관군"이라고 직군이 장악한 북경정부는 장작림의 모든 직책을 파직시키고 봉군의 분열을 획책하지만 장작상, 오준승 등 봉군 지휘관들은 철저히 장작림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서 실패로 돌아가죠. 동3성에서 장작림의 위치는 이렇듯 절대적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쓴맛을 본 장작림은 패전 직후 장학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저하게 군을 재정비하고 현대화시킵니다. 또 이를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동3성의 경제와 산업을 부흥시킵니다.

봉천시 외곽에 대규모 병기창을 건설했는데 이는 단일공장으로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였습니다. 연간 대포 150문, 포탄 20만발, 소총 6만자루, 중기관총 1천정에 달했습니다. 또한 해공군도 확충하여 항공기 300대에 2개 함대 군함 21척, 총톤수 3만톤이었습니다. 이는 여타 군벌들을 죄다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출처 욱이님의 블로그 동일한 제목의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라오우님의 존안은 구글 검색을 통해 복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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