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건축 측면에서 바라본 일제치하 한양(경성)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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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 합병의 결과,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락하면서 수도로써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일제는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의 지위를 깎아 내리고자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이 조치로 말미암아 경성의 범역은 크게 축소된다.
경성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이 경성을 떠났음에도, 경성의 총 인구수는 1910년 강제 합병부터 1910년대 말까지 대략 25만 명선을 유지하면서 큰 변화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경성을 빠진 자리를 일본인들이 채웠기 때문이다. 1914년부터 1920년 불과 6년 사이 일본인의 수는 5만9000명에서 6만5000명으로 10% 이상 늘어난다.
하지만, 인구가 정체되었던 1910년대가 지나고 1920년이 되면서 경성은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경성은 이전과 다른 차원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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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이 산업 도시라는 특징을 띠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농촌의 빈농들이 경성으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경성으로 모여든 빈농들 모두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도시 내 주거 빈민(걸인)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근일 서울 시내에는 걸인이 많이 증가되었으며, 앞으로도 더욱 증가될 형세로 농촌 형편이 곤란하여 시골서 살 수 없는 사람이 상경한 까닭이다."6)
비단 몰락한 저소득 농민층만 경성으로 몰려든 게 아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실력 양성에 대한 사회의식이 높아진 가운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대변되는 고급 교육 제공 기회는 지방 부유층에게는 경성을 매력적인 주거지로 만들었다. 여기에 보건의료 체계 개선으로 사망률이 감소하고 출생률이 증가하면서 자연 증가율도 상승하였다.
이로 인해 경성의 인구는 25만 명(1920년)에서 35만 명(1930년)으로 10년 사이에 40% 폭증하였고, 불과 15년 후인 1935년 인구는 1920년 대비 60% 증가한 40만 명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