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을까요? 물론 이 책임의 기준에 따라 어떤분들은 고종에게 지울수도 정조에게 지울수도 있고 심지어 세조에게 지울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까지 멀리 안가고 일제 시대 이후를 다뤄 보고 싶습니다.
일제시대 당연히 최악입니다. 근데 일단 일어난 일이니 할수 없고, 광복후에 다시 기틀을 잘 잡았다면
많은게 초기화가 되고 좋은 나라로 발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친일파와 종북이라는 이념 대결은 여전 하고 보수가 아닌 사람들과 진보가 아닌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대립을 하고 있고, 인터넷에서는 헬조선이다 지옥들 반도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0년 전만해도 차라리 미국의 52번째주로 들어가면 어떠한가 라는 이야기를 하면 욕먹었을텐데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습니다.
저는 사실 근현대사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일부 독립투사들 그리고 해방후 이야기 등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죠. 그러다 요즘 약간씩 근현대사를 파고 있었는데요. 황당하고 재미있는 사건 두가 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뭔가 이해가 되더군요.
1. 자유시 참변.
저 때는 자유시 참변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요즘 교과서에서는 한줄로 배우고 넘어간다거나 이렇게 배우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자유시 참변의 진실은 내분이 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싸웠죠.
1.1 결과
1.1.1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엄청나게 적은 수의 독립군이 됨
내분의 여파로 여단 규모는 될 수도 있었던 독립군이 아시는 그 적은 숫자로 쪼그라들게 되고 다시 회복 불가. 그로인해 전공을 낼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1.1.2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똥군기의 시초중하나가됨.
그 이후 인재가 부족해서 일본군 출신이 위에 서게 되고 독립군 내부도 돌아가는게 일본 군 처럼 돌아가게 되었으며... 물론 그 후에 독립하고도 똥군기가 이어지죠. 물론 일본군 출신독립군 아니더라도 충분히 일본군 출신 들이 윗대가리 가디긴 합니다만..
1.1.3 가장 중요한 극단적 반공주의가 생겨 남
저는 왜 그렇게 김구선생이 사회주의자를 싫어 했나 싶었었는데(친일파랑 동급정도로 싫어 해주시지..) 김구선생 아니더라도 많은 독립 투사들이 저 사건으로 사회주의쪽 독립단체들과 척을 지게 되고 독립 단체 자체도 분열하게 됩니다.
2.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결과는 위키로 대신합니다.
1차 자금사건은 사회주의운동 세력 내의 이르쿠츠크파, 상해파의 내부노선 투쟁을 불러왔고, 2차 자금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한인사회당의 사회주의 노선과 민족주의 노선간의 분열을 불러왔다.[6] 특히 2차 사건에 의해 사회주의 세력인 한인사회당이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축출되었으며, 임정 주류세력이 사회주의 계열을 크게 적대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신용을 실추시켜 자금확보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참고로 김립은 사건 이후로 김구가 보낸 청년들에게 추격당하여 상해 거리 한복판에서 암살당했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7]"고 평가했다.
임시정부에 자금을 내놓지 않고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으로 사용한 그의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만으로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설이 통설이었지만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8]
김립의 횡령 행위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한인사회당 등에 대해 적대적인 공산주의 세력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나눠서 전달된 200만루블의 자금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등에 어렵게 운반해 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사업비로 활용되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4] 김립의 암살 등으로 나머지 140만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흠... 이게 22년 이후 있던 사건이며... 저기 위의 21년 자유시 참변이 독립단체들에게 영향을 안미치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독립군과 독립단체들이 분열된 상태에서.. .단합해도 힘들었을텐데. 안타깝게 되지요.
3. 기타 이야기들.
저는 빨갱이라는 욕이 부카니스탄이 만들어진 이후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아니더군요. 저런 일들 이후에 빨갱이 욕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이후에 그렇게 빨갱이를 친일파보다 싫어 했던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에 참여하게되고... 한독당은 분열하게 됩니다.
흠... 물론 독립투사분들의 위대함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사는동네인 이상 어느정도 분열이라거나 파벌이 없을 수는 없다지만. 독립군과 독립 단체들이 이렇게 분열이 되었고.. 그결과 더 활발하게 활동을 할수 있었던 독립군과 독립단체의 힘은 약해졌습니다. 소련과 미국의 차이 중하나가 소련이 북에 들어올때 이런 관련된일을 알알았고 안정을 빨리 시켰다고 하지만 미국은 임정등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하지요. 사실 미국은 미군정 들어오기전에 한국에 대해 관심도 정보도 없었었는데. 만약 알았다면 초기 대통령 부터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빨갱이에 관한 분노는 북한부터가아니라 저때 부터라고 봐도 무방할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친일파가아니라 사회주의자가 주적이 되었고(이왕 하는거 둘다 잡지...) 친일 척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