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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은 거스 히딩크,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1
게시물ID : humorbest_2248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눈물한스푼
추천 : 35
조회수 : 3716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9/02/09 00:52:25
원본글 작성시간 : 2009/02/08 23:17:31

 

(히딩크 감독의 애창곡 'My Way'입니다.)

 

 

 

 

 

내 이름은 거스 히딩크,

내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1946년 11월 8일,

나는 네덜란드의 바르세펠트에서 태어났어.

 

 

 

모두의 생각과 달리 사실 난 어린 시절 나는 자기 고집이 강해 지기 싫어했으며

공부에 우수했던 형제들과 달리 뛰어노는 걸 좋아했어. 한마디로 철없었던 거지.

 

 

 

공부엔 흥미가 없었지만 활동적인 운동을 좋아했어. 그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했었지.

정원에서 항상 벽차기(혼자서 벽을 상대로 공을 차는 것)를 했었거든.

 

 

 

나는 기술학교를 다니고 체육교사가 되기 위해 전문학교에 들어갔어.

축구전공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지.

 

 

  

(사진의 맨 오른쪽)

 

20세가 된 나는 젊은 나이에 코치 자격증을 따는데 성공했어.

졸업 후 1967년 데 그라프샤프 팀에서 선수 겸 코치(플라잉 코치)로 뛰게 되었지.

 

 

 

처음엔 코치 역에 전념할 생각이였는데

팀의 사정상 생각보다 선수로서 출전 기회가 훨씬 많았어.

그러면서 점점 선수로 활약하게 되었지.

 

 

 

 데 그라프샤프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나는 1970년에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하게 되었어.

 

 

 

 

그러나 PSV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어.

선수로서의 실력이 특출나지 못해 출전기회가 드물거든.

결국 PSV에서의 생활은 1년만에 막을 내렸지.

 

 

 

실력도 문제였지만 포지션 문제가 결정적이였어.

당시 PSV엔 내가 뛰는 위치에 무려 4명이나 포진해 있어서 치열한 주전경쟁을 해야만 했지.

그 아픈 경험 이후론 난 팀을 이끌 때 한 포지션에 반드시 2명 이하의 선수만 두고 있어.

 

 

 

데 그라프샤프로 돌아온 나는 1977년까지 팀의 선수로서 헌신했지.

그러다 1978년부터 새로운 경험을 위해 미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어.

 

 

 

나의 경력에 있어서는 미국에서의 생활은 큰 전환점이였지.

조국 네덜란드를 벗어난 나는 미국의 넓은 대륙을 경험하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어.

세계가 넓긴 넓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

 

 

 

미국은 축구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였기에 나는 코치, 교사로서 귀중한 경험을 쌓았어.

그중에서도 나는 퀸베아트릭스 학교에서의 교사 경험을 잊을 수가 없지.

 

 

 

퀸베아트릭스 학교는 비행 청소년과 정신지체아, 장애아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였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주기 위해 그 학교에 자원했지.

 

 

 

생각대로 특수한 아이들을 다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어.

저마다 개성이 달라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시도때도 없는 돌발행동에 난감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지.

 

 

 

그렇게 그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성이 강한 사람을 다루는 법을 깨우치게 된거야. 

그때의 경험을 통해 난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사로잡는 나만의 방법을 익히게 된 것이지.

 

 

 

"거기서 보낸 10년 동안, 나는 대단히 많은 것을 즐겁게 배울 수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 선생님으로 있다 보면 매일 동정심이 늘어 갑니다.

그때의 경험을 프로 선수와 지내면서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

그러므로 거기에 맞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걸 설득시켜야지요.

일반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선수가 정신적으로 성숙할 때까지

계속 성장시키는 것이 코치의 책임입니다."

 

 

 

그후 1982년을 끝으로 데 그라프샤프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고

본격적인 코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

 

 

 

나는 젊었을 때부터 선수 생활과 코치 생활을 하는 까닭에

경기 실전감각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고 나만의 선수 관리와 전술 운영을 익힐 수 있었지.

덕분에 짧은 시간에 코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게 되어 1984년 PSV에서 수석코치로 일하게 되었어.

 

 

 

 

길고긴 코치 생활 끝에 감독이 된 건 1986년.

PSV는 명문팀이였지만 그해 성적은 좋지 못했고 결국 감독이 사임하게 되었어.

갑작스런 사임으로 난감해진 구단은 급히 수석코치인 나에게 감독직을 제안하게 된거지.

그동안 내가 쌓아온 경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시간이 온거야.

 

 

 

임시 감독직을 승락한 나는 리그하위권에 있는 팀을 바로잡고

단숨에 치고올라가며 감독 첫해에 1위를 차지했어.

 

 

 

그후 정식 감독이 되어 총 5년간 PSV를 이끌게 되었어.

네덜란드 리그 우승 4회, 네덜란드컵 우승 2회, 게다가 유럽피안 리그(現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그야말로 대성공이였지.

 

 

 

1990년부터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세계적인 명문팀인

터키의 페네르바흐체(90-91), 스페인의 발렌시아(91-93)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세계를 무대로 도전하게 되었어.

 

 

 

 

그후 2년을 공부하면서 쉬다가 1995년부터 조국 네덜란드의 국가대표 감독을 맡게 되었어.

유로96에서는 팀을 8강에 진출시켰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임했지.

 

 

 

 

그러다 조별 예선에서 한국과 맞대결하게 되었어.

결과는 5-0. 네덜란드의 완승이였지.

당시 한국은 기술은 있었지만 그뿐이였지.

무엇보다 자신감이 부족했고 체력에서 떨어졌어.

그것이 내가 본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었지.

 

 

 

네덜란드는 승승장구했지만 아쉽게도 4강에서 만족해야 했어.

아쉽긴 했지만 나로선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알린 나는 월드컵이 끝난 직후

세계 최고의 명문팀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의 지휘봉을 잡을 수 있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그 누가 알았겠으랴?

레알 마드리드행이 내 축구인생에서 오점을 새길 줄을...

 

 

 

내가 부임한 98/99 시즌에도 레알 마드리드엔 걸출한 스타들이 있었지.

그러나 난 젊은 선수들을 키워 장기적으로 튼튼한 팀을 만들고 싶었어.

나는 젊은 20대이자 가능성이 보이는 라울, 모리엔테스, 카시야스 등을 중용했지.

이 때문에 거액의 연봉자인 98 월드컵 득점왕 수케르는 벤치 신세를 면치 않을 수 없었어.

 

 

 

 하지만 불운하게도 팀은 성적이 좋지 못했지.

그러다보니 경질설이 떠올랐고 연일 비난을 받았고 설상가상 팀은 번번히 대패하고 말았어.

심지어 당시 구단주가 자신의 아들을 팀에 넣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해 재계약에 실패했지.

 

 

 

그 충격으로 한동안 감독직을 쉬어야만 했어.

더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지.

 

 

 

이후 나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어.

팀을 맡을 때 최고의 팀보다 '가능성 있는 팀'을 골랐지.

때문에 첼시나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의 제의를 받았을 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거야.

 

 

 

 그러다 2000년, 휴가를 보내고 있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어.

바로 대한축구협회였지. 그들은 2002 월드컵 한국 대표팀 사령탑에 나를 원한다고 했어. 

 

 

 

그순간 나는 느꼈지.

새로운 곳에서 도전해보고 싶다고.

 

 

 

2000년 12월 18일. 나는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되었어.

그리고 운명적인 한국 선수들과의 만남.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어.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지.

 그들은 내가 지시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어.

한마디로 한국에게 엄청난 가능성이 보였지.

 

 

 

그러나 시작조차 쉽지 않았어.

한국축구는 실패를 대단히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했거든.

아시아만 벗어나면 줄어드는 선수들, 변화와 패배를 두려워하는 축구협회와 팬 등.

 그렇지만 결론은 이를 이겨내는 것이 중요했어.

 

 

 

 나 또한 낯설은 팀을 지도해야 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지.

유럽식 파워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수많은 평가전을 치루면서

장기간 합숙 훈련을 통해 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려 노력했어.

 

 

 

한국 선수들은 똥볼을 차는 것에 대해 대단히 두려워했지.

그들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어.

상대팀은 한국의 실수를 100% 골로 연결시키는데 비해

한국 선수들은 상대팀의 실수는 골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바로 자신감이였지.

 

 

 

"똥볼도 자신있게 차라.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없는 건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이다."

 

 

 

나는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무대를 앞두고 있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심감을 주입시키려고 노렸했어.

한국이 그동안 세계무대에서 큰 성적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감 부족 때문이였지.

 

 

 

프랑스와 체코에게 5-0으로 대패하자 나는 '오대영' 감독으로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어.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았어. 이는 어디까지나 과정에 불과했거든.

주위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나와도, 나는 계속 나의 길을 향해 나아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선수들에게 통하기 시작했어.

선수들의 눈빛에서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지.

그들은 기다리지 않았어. 기회를 잡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지.

 

 

 

월드컵을 한 달 앞두고 가진 강호와의 평가전에서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며 좋은 결과가 나왔고,

이는 결국 나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어.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

(2002년 5월. 월드컵을 한달 앞두고)

 

 

 

그리고 다가온 운명의 2002 한일 월드컵.

난 아직도 그때를 떠올려...

 

 

 

첫 경기, 폴란드 전

 

 

 

 

한국의 시작을 알린 황선홍의 감각적인 선제골이 터졌어.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컸던 그였기에 더욱 감격적인 골이였지.

 

 

후반엔 멀티플레이어 유상철의 쐐기골.

  팀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

 

 

 

2-0 완승을 거두며 48년만에 염원하던 첫승을 이루었고

 

 

 

두번째 경기, 미국전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경기였는데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선제골을 내주는 최악의 출발로 인해

경기를 전체적으로 주도하고도 골이 터지지 않아 좀처럼 불안이 떨칠 수가 없었거든. 

 

 

 

 

다행히(?) 후반에 터진 안정환의 골로 동점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어.

 

 

 

조예선 마지막 경기, 포르투갈 전

 

 

 

모두가 월드컵 시작 전 강호 포르투갈과 같은 조에 속하자 불안해했지만

난 오히려 폴란드와 미국이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어.

당시 포르투갈은 공격이 단순해서 피구와 파울레타만 막으면 끝이였거든.

 

 

 

한국은 놀랄 정도로 완벽한 압박을 선보이며 포르투갈을 제압했어.

특히 송종국은 포르투갈의 핵심인 피구를 완벽하게 지워버리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경기를 주도한 한국은 박지성의 결승골로 16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지.

 

 

 

16강에 진출하자 국민들은 열광했고 마치 모든 염원을 푼 듯 기뻐했어.

이에 선수들도 들떠서 풀어지기 시작했지.

 

 

 

나는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나는 선수들과 기자가 모인 자리에서 한마디 했지.

 

 

 

"내가 잘못 본 것일수도 있지만

너희들에게 풀어진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이 정도로 들떠서는 안된다."

 

 

 

그제서야 선수들은 긴장을 하기시작했어.

나는 팀의 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한마디 했지.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앞두고)

 

 

 

16강에서 만난 상대는 이탈리아.

경기는 그야말로 혈전(血戰)이였어.

 

 

 

거친 몸싸움과 아찔한 상황이 반복되었고,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지.

 

 

 

경기 종료의 순간에 다가갈수록 나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어.

4명의 공격수를 올리는 2-4-4 포메이션을 강행시켰지. 그야말로 도박이였어.

 

 

 

예상대로 이탈리아는 수비에 치중했고 한국은 공격의 기회를 노렸지.

선수들의 정신력은 경기 종료 순간에 다가갈수록 더욱 높아졌어.

 

 

 

"(지고 있었지만) 질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 유상철 -

 

 

 

그 믿음이 통해서일까

 

 

 

 

경기 종료를 3분을 앞둔 후반 42분, 설기현의 기적같은 동점골이 터졌어.

대표팀의 주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감이 부족하여 비판을 받던 그였지만

언제나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이 비로소 빛을 보는 순간이였지.

 

 

 

경기는 연장으로 흘렀고 승부차기로 넘어갈 무렵...

누구도 믿기 힘든 기적같은 드라마가 연출되었지!

 

 

 

 

치열했던 경기의 종점을 찍은 안정환의 극적인 골든골.

전반에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수많은 찬스를 날리며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나는 그가 골을 넣을 선수임을 알았기에 계속해서 그를 기용했으며,

마침내 그는 이에 보답하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지!

 

 

 

내가 월드컵 전 그에 대한 욕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그의 잠재력을 최고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어.

나는 그가 누구보다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

결국 그는 2002 월드컵에서 한국선수 중 유일하게 2골을 성공시켰지.

 

 

 

한국의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

나는 스페인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경험을 쌓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이였지.

 

 

 

선수들은 상당히 지쳤지만 강한 정신력과 붉은 함성에 일어나 계속해서 뛰었어.

경기는 치열했지만 득점없이 0-0. 신의 선택, 승부차기에 돌입했지.

 

 

 

사실 스페인은 16강에서도 승부차기를 했던터라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었어.

벤치에서 방향을 알려주겠다는 지시에도 이운재는 정중히 거부했지.

나는 그의 믿음직한 답변을 듣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맏겼어.

 

 

 

또한 키커들에게 스페인의 골키퍼인 카시야스는 (키커 입장에서) 오른쪽 방어가 약하다는 것도 알려주었지.

이는 스페인의 16강전 승부차기 자료분석과 내가 레알 마드리드에 있을 때 그를 직접 보고 느꼈던 것이였어.

 

 

 

선수들은 모두 가운데와 오른쪽으로 성공시켰고,

이운재가 4번째 키커 호아킨의 킥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지.

 

 

 

승리의 기회는 마지막 키커, 주장 홍명보에게 달려있었어.

한국의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인 홍명보에게 말이지.

 

 

 

4강행을 앞두고 모두가 긴장한 순간,

 

 

 

 

한국의 4강 진출을 장식하는 홍명보의 성공.

 

 

 

 

 

 

한국은 4강 진출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데 성공했어.

그야말로 세계축구 역사상 길이남을 순간이였지.

 

 

 

준결승, 독일 전.

 

 

 

 

한국은 마지막까지 포기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0-1 패배였어.

 

 

 

여기까지 온만큼 반드시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로 가고 싶었지만,

한국은 너무 지쳐버렸고 집중력이 떨어지며 실점을 허용했지.

 

 

 

그렇게 거침없이 승리를 향해 달려온 한국의 질주는 4강에서 멈추고 말았어.

 

 

  

3/4위전의 상대는 같은 돌풍의 주인공인 터키.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이을용의 그림같은 프리킥 동점골로 추격.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 이것도 경기 전에 세운 전략으로 그대로 맞아 떨어진거야.

언제나 안보이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던 이을용은 한국의 숨은 공신이였지.

 

 

 

 

종료 직전에 터진 송종국의 만회골.

그는 한국의 가장 뛰어난 체력의 소유자로 골키퍼 이운재를 빼고

한국의 전 7경기를 모두 풀타임으로 소화한 유일한 필드플레이여였지.

 

  

 

 

경기는 2-3으로 졌지만 모두가 우승 못지 않은 한국의 4강에 환호했고 붉은 함성은 식을 줄 몰랐어.

한국과 함께 한 2002 월드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였지!

 

 

 

 사실 경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선수들이야.

난 감독으로 그들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보조자 역할이지.

4강에 진출한 한국의 보이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걸까?

 

 

  

 

한국이 전력을 100% 끌어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한국의 12번째 선수, 붉은 악마의 뜨거운 함성 덕분이였어.

정말이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온몸에서 흐르는 전율을 주체할 수 없었지.

 

  

  

 

월드컵이 끝난 후 '감동의 국민대축제, 카 퍼레이드'에서

나는 수만명이 있었다는 그 시청 앞 광장에서 화단이 멀쩡하게 살아남은 걸 보고 전율을 느꼈어.

내가 알던 한국 사람들의 진정한 힘은 여기에 있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였지.

 

 

 

 그리고 월드컵을 끝으로 나는 마침내 잊지 못할 한국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어.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수천명을 보고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랬지.

 

 

 

"안녕이란 말은 하지 않겠다."

(2002년 7월. 네덜란드로 출국하며)

 

 

 

 

 네덜란드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계속 한국 꿈을 꿨어.

2002 한일 월드컵은 끝났지만 거리 가득 붉은 물결 출렁이며 뜨거운 성원을 보내준 한국 팬들을 나는 잊을 수 없었거든.

 

 

 

 

그후 2006년까지 PSV 감독을 맡아 클럽팀 감독에 전념했어.

매시즌(02/03, 03/04, 04/05, 05/06 시즌)마다 우승하며 리그 4연패 달성했지.

 

 

 

특히 04/05 시즌에 있었던 챔피언스 리그에서 4강에 진출했으나

눈앞에서 결승 진출을 놓친 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지.

(당시 준결승에서 AC밀란과의 통합 점수 3-3. 어웨이 다득점 방식으로 탈락)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호주의 제안에 다시 한번 월드컵에 도전하고 싶었어.

호주는 얌전한 한국과 달리 비록 건방졌지만 늘 자신감과 의욕이 넘쳤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지.

 

 

 

 

오세아니아에게 주어진 0.5장의 월드컵 진출 티켓으로 인해 플레이오프를 치뤄야했어.

우루과이와의 치열한 플레이오프 끝에 승리하며 호주를 32년만에 월드컵에 진출시켰지.

 

 

 

 

조예선 일본 전에서 3-1 대역전승을 거두며 조 2위로 16강 전에 진출했어.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지만...

 

 

  

16강에서 또 한번 이탈리아(2006 독일 월드컵 우승팀)를 만나게 되었지.

종료 직전에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페널티킥을 내주며 탈락하고 말았어.

 

 

 

“히딩크 감독은 내가 그동안 겪어본 감독 가운데 최고였다.

감독은 선수 관리와 전술 등 두 가지 측면에서 축구팀을 이끄는데 히딩크는 전술은 물론 특히 선수 관리 측면에서 독보적이다.

난 히딩크 외엔 모든 선수가 팀을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충성하도록 만드는 감독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나도 히딩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수 있다.”

- 마크 비두카 (2006 월드컵 호주 대표팀 주장)-

 

 

 

월드컵이 끝난 후 호주와의 계약이 종료되었고

첼시와 잉글랜드에서 감독직 제의가 왔어.

 

 

 

 

물론 거절했지. 앞서 말한대로

난 최고의 팀보다 가능성 있는 팀을 맡기를 원했거든.

 

 

 

 이번엔 러시아 감독을 맡게 되었어.

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부임 전 한국과 굉장히 흡사한 팀이였거든.

나는 한국을 맡았을 때의 경험을 러시아에 적용시켰지.

강한 체력으로 만들기 파워 프로그램을 말이야.

 

 

 

 

유로 예선에서 한치도 앞을 볼수 없는 치열한 상황에서 축구종가 잉글랜드를 누르고,

극적으로 조2위로 유로 본선에 진출했어.

 

 

 

 그리고 유로 2008.

첫 경기에선 스페인을 만나 4-1으로 대패하고 말았어.

그러나 이 패배로 러시아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그후 러시아는 심기일전하며 다음 경기에 임했어.

유로 2004 우승팀인 그리스와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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