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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의 분노 한반도를 울리다 - 고국원왕 복수의 종말 -
게시물ID : history_224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5
조회수 : 126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8/13 14: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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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big.jpg

“신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가 매우 돈독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선조인 고국원왕(釗)이 이웃 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백제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근구수왕(須)께서 군사를 정돈하여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 지 잠깐 만에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높이 달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위서>백제전)

백제왕은 과거에(375년)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인 사실을 북위 조정에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장수왕에게 그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주변 나라에 보여주고 싶었다. 475년 초겨울(9월) 장수왕이 고구려군 3만명을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를 급습했다. 단번에 한성을 포위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은 성문을 열고 나아가 고구려 군대와 대결할 자신이 없었다.

고구려 군대는 4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2개의 군단은 한성의 배후 요새인 북성(北城)을 공격했다. 성벽을 사방에서 7일 밤낮으로 공격했다. 거대한 돌이 날아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그 후 고구려군들이 성벽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기어오르는 것이 반복되었다. 수비하던 백제군들은 이렇게 진이 빠져갔다. 북성이 먼저 함락됐다.

-중략-

장수왕은 백제왕과 그 가족을 고이 죽이려 하지 않았다. 개로왕의 죄목이 나열되었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그 처형의식에 할애하였다. 형리가 포박된 그를 잡아채서 모루 위에 그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연장은 둔탁한 소리를 냈고, 피가 떨어지는 머리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백제왕과 그 가족의 처형의식이 끝나고 한성 사람들 가운데 젊고 쓸만한 사람은 모두 줄줄이 묶여 한강을 건넜다. 왕경에 살던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백제의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궁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귀족들, 중하급 관리들, 궁인들, 궁중 수공업장의 장인들과 강둑을 관리하던 토목기사들이 총망라되었다.

-중략-

소식을 접하고 노이로제에 걸렸을 신라 자비왕(신라 제20대ㆍ458~479 재위)을 생각해 보자. 자비왕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온몸의 근육이 풀어지고 아래턱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장수왕이 개로왕과 그 가족을 잡아서 모두 학살했다고! 고구려 장수왕의 분노가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비왕은 자신의 목을 확인해 보고 공포 서린 눈빛으로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듬해인 476년 1월에 자비왕은 반월성을 버리고 명활산성으로 숨었다. 488년(소지왕 10년)까지 명활산성은 왕궁의 역할을 했다.
출처 http://www.korea.kr/gonggam/newsView.do?newsId=1487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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