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년 북위(北魏)의 공격이 거듭되면서 북연은 국가의 존재가 위태로운 상황에 봉착했다. 북연의 통치자 풍홍(馮弘)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사신을 보내 사태가 여의치 않을 경우 고구려로의 망명을 요청했다.
436년 2월 북위가 북연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요서의 화룡성(和龍城·오늘날 朝陽)을 향해 진군했다. 장수왕도 군대를 북연으로 보냈다. 가라앉는 배 북연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북연 수도의 물자와 인력이 고스란히 북위로 넘어갈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올지는 불확실했다. 하지만 너무나 큰 이권이 걸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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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고구려 군대는 맹수로 변하여 북연의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과연 여자와 사치를 좋아하던 후연의 모용희는 북연에게 화려한 왕궁을 물려주었다. 약탈이 허락되었다. “원하는 대로 가져라.”
화룡성의 화려한 궁정과 중원에서 살다가 온 귀족들의 대저택이 병사들의 사냥감으로 변했다.
고구려 장군 갈로맹광은 전시에 병사들에게 약탈만이 유일한 즐거움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선왕인 광개토왕 대부터 전쟁에서 고생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전장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묵묵히 왕을 따라준 것은 이러한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화룡성의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두 팔 가득 보물을 빼앗고, 가능하다면 후궁으로 달려가 미녀를 안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약탈자 무리들은 성난 파도와 같았다. 장군, 장교, 병졸할 것 없이 광란의 잔치에 뛰어들었다. 군대만큼 재미없는 집단은 없다.
승전 후 약탈은 군의 사기를 높이는 특효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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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기병은 대열의 외부에 있고, 북연인들은 행렬의 가운데 서게 했다. 갈로맹광이 이끄는 고구려 기병이 대열의 후면을 맡았고, 수백 대의 수레로 움직이는 벽을 만들었다.
고구려로 향하는 80리에 달하는 장대한 행렬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북위군은 고구려 기병의 행렬을 끝내 공격하지 못했다. 당시 북위는 인간 백정 태무제(太武帝·408~452)가 다스리고 있었고, 세계 최강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태무제(탁발도)는 북방의 유목제국 유연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지휘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살육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425년에도 기병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횡단해 유연을 습격했고, 이후에도 인간 사냥대를 조직하고 초원으로 향했다.
태무제가 고구려 군대의 행렬을 덮치지 못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화룡성의 북쪽 거란족의 본거지인 시라무렌강 유역은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북위군은 고구려 휘하에 있는 거란족 유목민 기병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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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고구려군이 떠난 후 화룡성에 열흘 동안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북위군은 고구려군 행렬을 추격하다가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의 결과로 북연의 수도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고위 계층과 군인·호구들이 고구려에 이입됐다.
북위는 북연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가치 있는 인력과 물품은 고구려가 가로챘다. 그 양과 질의 측면에서 고구려사에서 최대였다. 장수왕은 노련했다. 북위와 전쟁을 해 가면서까지 북연의 요서 땅을 지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