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소수 권력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의 희생을 도외시한 채 정권 유지를 위해 군사적 모험을 벌인 것에 대해, 그것이 외적과의 싸움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족적인 것이라고 평가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삼별초의 무엇이 민중적이고, 무엇이 민족적인가?" - 이익주 교수
삼별초에 대한 총평은 뒤로 미루고... 우선 얘기를 끝내 보도록 하죠.
상륙작전이라 해서 그냥 육지에 배를 갖다 대면 될 것 같지만, 해전의 연장선상이니만큼 지형과 날씨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대규모 상륙을 위해서는 많은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안 쪽으로 들어간 만이 필수죠. 큰 항구들도 이런 데 있구요. 상륙 지점은 절벽 같은 것이 아닌 상륙하기 좋은 백사장 등의 환경이어야 하고, 배를 탄 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강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그렇다고 목표 지점과 아주 멀어서도 안 되죠. 이런 점에서 여몽연합군이 선택할 수 있는 곳도 제한돼 있었고, 삼별초 역시 상륙 지점을 예상하기 쉬웠을 겁니다.
항파두리성 등 삼별초의 근거지가 있었던 애월읍, 거기서 가까운 포구는 서쪽 한림읍에 있던 명월포였습니다. 삼별초가 들어온 곳도 이 곳이었죠. 하지만 이건 너무 눈에 띄죠. 이에 김방경은 양동작전을 구사합니다. 30척에 풀을 싣고 불을 붙여 명월포 앞바다로 띄워보낸 것이죠. 김통정은 이에 맞서 명월포 근처에 병력을 매복시키죠. 김방경은 이 틈을 타 좌군 30척을 비양도(역시 한림읍)에 남긴 채 동쪽 조천읍으로 이동합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함덕포, 넓은 백사장도 있어서 상륙에도 좋은 곳이었죠.
김통정은 이에 맞서 소수의 복병을 남겨둡니다. 이들의 기세에 전군이 주춤했지만, 김방경이 크게 꾸짖으며 진격을 외치자 곧 무너집니다. 김통정이 나름의 준비를 했지만 주력이 이 곳으로 오는 것까지 예상하진 못 한 듯 합니다. 이 때 대정 고세화가 직접 돌격하니 병사들도 뒤따라 공격했고, 장군 나유가 선봉을 이끌고 진격하니 소수의 삼별초는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본군이 항파두리성으로 가니 명월포를 지키던 병력은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 좌군 30척이 들이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듯 내성으로 달아나 들어갔다"고 하죠.
김통정은 항파두리성 북쪽 파군봉에 주둔해 연합군을 막으려 합니다. 김방경은 이를 공격, 승리하죠. 이렇게 삼별초를 깨뜨렸다 해서 이 언덕은 파군봉이라 불립니다. 한편 좌군은 항파두리성을 공격했는데 성을 지키던 이들은 외성을 포기했고, 연합군이 불화살을 쏘며 내성까지 공격하자 항복합니다. 아직 김원윤 등 항복하지 않은 이들이 계속 맞섰지만 김방경의 본대가 오자 성은 완전히 함락되죠.
김통정은 마지막으로 항파두리성 남동쪽 적악으로 이동해 최후의 결전을 맞습니다. 적악은 한자 그대로 붉은 오름, 양군의 혈전이 벌어진 곳이었습니다. 이 결전으로 삼별초는 전멸, 김통정은 70명을 이끌고 한라산으로 숨었지만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김방경은 항파두리성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알립니다.
"괴수는 죽이되 협박받아 따른 사람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말 하며 김원윤 등 6명만 죽이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으니 그 수가 1천 3백이었습니다. 김방경은 최대한 기존에 삼별초에 가담한 사람과 제주도민을 구분했습니다. 이미 그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말라는 황제의 명까지 떨어진 상황, 진도에서 있었던 몽고군의 약탈을 최대한 막으러 한 것이었죠. 이렇게 제주도민들에 대한 처벌이나 약탈은 없었고, 육지에서 삼별초를 따라 온 이들 역시 나주에 도착해 35명을 처형한 후 나머지는 불문에 붙입니다. 다만 원군 5백과 고려군 1천을 남겨서 어디 있을지 모를 삼별초의 잔당을 수색하게 했죠.
6월, 김통정의 시체가 발견됐고(원사에는 김통정을 생포해 처형했다고 합니다만...-_-a 고려사에는 고려 장군 송보연이 시체를 확인했다고 하죠) 최후의 70명도 모두 붙잡힙니다. 홍다구는 이들을 곧바로 처형하죠.
뭔가 이런 저런 전설 얘기도 하면서 전황들도 나름 분석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깔끔하게 이렇게 맺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질질 끌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요 ^^; 저번 편이 좀 길어져서 그렇지 이 내용 자체를 저번 편으로 끝내고 싶었기도 했구요.
그럼... 저 나름대로 삼별초라는 이들을 정의해 보겠습니다.
삼별초가 진정 원했던 게 무엇인지는 참 애매합니다. 순수하게 대몽항쟁을 지속하려 했다면 임유무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죠. 거기다 전라도 할양을 요구하기도 하고 조정의 페이크였지만 회유책에 어느 정도 말려들어가기도 했구요. 이 점에서 "대몽항쟁"이라는 기간에 삼별초를 포함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
민족적인 이유로, 혹은 반몽 감정을 가진 백성들이 호응했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의문입니다. 분명 삼별초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났지만 과대평가는 금물이죠. 고려사에는 이 삼별초에 호응한 것 이상으로 고려를 벗어나 다른 세력에 기대려 했던 자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신분 해방을 노린 노비였든, 앞으로의 기득권이 됐을 중상류층이든 다를 게 없었죠. 바로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입니다. 고려인으로 몽고에 수탈당할 바에야 그냥 몽고인이 되자는 마인드였겠죠 -_-; 삼별초에 호응했던 백성들 역시 그저 반고려의 어딘가에 기대려 한 수준이었죠. 반면 삼별초가 약탈했던 것 역시 바로 그 백성들이 그나마 일군 것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민족적", "민중적"이라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대몽항쟁에 대한 의지가 아예 없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반기를 든 게 원종에 대해서만이었다면 그들의 운명은 어느 정도 달라졌을 겁니다. 특히 제주도로 가서 고려도 몽고도 잊고 있었을 때 가만히 있었으면 목숨은 좀 길게 부지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들은 진도에서든 제주도에서든 합포의 몽고군 기지를 공격합니다.
그럼 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서 맨 처음에 꺼냈던 "군인"이라는 화두를 다시 꺼내보려 합니다.
네. 군인은 사람 죽이는 기술을 배우는 곳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범죄"인 것을 합법적으로 하는 집단이죠. 전근대나 근대나 지나친 범죄를 막기 위한 장치들이 있긴 했지만, 이걸 아예 막지는 못 합니다.
약탈에 치중했기에 아예 사람 죽이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게 주입받은 이들도 많았지만 농경 민족, 특히 고려와 조선 같은 경우 군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지금과 그리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 때는 왕에 대한) 국가에 대한 충성, 적의 침략을 막고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죠. 이는 분명 정당한 것이고, 정당해야 합니다. 지금 군대에 가는, 갔다 온 우리도 사람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고, 그 때도 무지렁이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런 확실한 "정당화"가 없다면 자기는 그저 사람 죽이는 기술만 배워 온 것이 되거든요. 군대에서나 갔다 와서나 그냥 뺑이친 거다, 시간 아깝다는 식으로 말 하지만, 지난 ebs 강사 군대 비하 사건 때 화 냈던 사람들 역시 바로 그들입니다.
한국의 경우 군인 자신의 생각이나 일반인의 시각으로나 군인에 대한 시각이 영 좋지 않죠. 이건 경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요. 군사 독재의 가장 큰 후유증 중 하나입니다. 6.25 전을 빼더라도 군인이 쿠테타에 동원된 게 두 번이고, 일반인 진압(이라고 쓰고 학살이라 읽죠)에 동원된 게 바로 한 세대 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인이 좋게 보이기는 무리죠. 차라리 다른 나라처럼 6.25의 전쟁 영웅들이 집권한 거였다면 이해라도 가지만 그들은 아니었구요. 자기들은 천년만년 해 먹을 줄 알았겠지만, 이는 결국 군인에 대한 인식을 극도로 낮추게 돼 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이 너무 저평가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면 지금까지 하나회가 없어지긴 했을까 의문이거든요. 신한국당부터 현 새누리당에 이르기까지 병역 문제가 계속 회자되는데, 이는 다시 말 하면 그 때 정치군인 하나는 확실하게 잡았다는 것 아닐까요? 이걸로 삼당 합당을 가릴 순 없겠지만, 삼당 합당으로 이걸 가릴 수도 없죠. IMF로 인해 이게 저평가 된다면 역시 중요한 건 경제인 건가 생각하게 되구요.
이런 군사 독재 반작용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너무 심합니다. 전쟁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6.25라는 나라가 망할 뻔한 전쟁을 겨우 막아낸 게 한국인데 말이죠. 나라가 잘 살수록 군인의 가치는 떨어지는 법이고 군사 독재가 없었더라도 군인들이 무시당하긴 했을 겁니다. 지금 군대무용론이 심심하면 나오는 것처럼요. 그래도 대한민국 국군은 한 차례 나라를 지켜 냈고, 지금도 휴전선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의 후유증이든 민주화후에 뭔 말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든간에 이들은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할 평가도 받지 못 하고 있습니다. 전쟁 범죄에 대한 비판을 넘어 국군 전체를 전쟁 범죄 집단으로 규정하거나, 국군은 미제의 괴뢰군으로, 북한군은 해방군으로 평가하는 것, 쿠테타에 동원된 군인이 얼마나 됐다고 국군의 역사 전체를 국민의 적인 것처럼 (거기다 통일을 방해한다는 것까지 덧붙여) 얘기하는 것들 말이죠.
맨 처음에 군인은 집 지키는 개라고 했습니다. 절대적인 충성과 상명하복이 없다면 군대라는 조직은 있을 수 없으며, 이런 명령 체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이들에 대한 통제가 풀어진다면 무서운 무력을 가진 사람 죽이는 기술 가진 집단이 될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군인은 명령을 따를 뿐, 아무것도 하면 안 됩니다. 결국 문제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정치인들과, 이들을 대접해 줄, 이들에게 보호를 받아야 되는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죠. 대한민국 건국 이래 국군은 여러 차례 권력에 이용당해 왔고, 나라의 사정을 핑계로 극히 적은 보수로 충성을 강요당했습니다. 현재는 이에 대한 비판을 넘어 "나라를 지킨다"는 것 자체도 무시될 때가 많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나 보고 계신 피지알러 분들이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정치가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보호를 받고 이들을 평가해 줄 일반인이죠. 군대 내의 여러 문제에 대한 비판은 "우리를 지킬 군대의 문제"이기에 비판하는 것이고, 그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비판은 "우리를 지켜야 되는 군대가 우리를 공격한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를 넘어서 국군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마저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자신의 어떤 정치 성향을 떠나서요.
잡설이 너무 길었군요. 이를 삼별초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삼별초는 기본적으로 최우에 의해 만들어진 최씨의 사병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병과는 조금 다르게 자기 목소리를 냈죠. 그렇다고 고려 중앙군도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분명 이들 역시 숙청의 대상입니다. 최씨가 곧 고려이던 시대가 끝났으니 그 잔재는 없어져야 하고, 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군인은 가장 위험하죠.
문제는, 이들은 대몽항쟁의 주역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시선이나 당시 고려 본토에 남은 백성들의 시선으로는 아니겠지만 강화도에 있던 이들, 특히 왕실에 있어서는 아무리 최씨의 개라 한들 분명 자기들을 수십년간 지켜 준 개였습니다. 거기다 마지막에는 임유무를 죽임으로써 왕정복고를 한 주인공이었죠.
헌데 이런 큰 두 가지 커다란 공, 대몽항쟁과 왕정복고라는 것을 모두 무시당한 채 그들은 해산돼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받아야 할 것들을 받지 못 하게 된 상황이니까요. 분명 그들은 안정된 직장과 자기들 공만큼의 지위를 원했을 겁니다. 이를 단지 먹고사니즘이라고 폄하할 수 없습니다. 유교식 가치나 "없어져서 정말 해 줄게 없었기에" 아무것도 못 받고 해야 했던 독립운동가들 때문에 이게 지나치게 강조되는 거죠. 임정의 문지기가 되겠다 했던 김구가 진심으로 그것만 바랬을 리가 없죠. 자기가 한 것만큼 받고 싶은 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 하는 상황, 수십년간 고려를 위해, 왕을 위해 싸웠던 것이 부정되는 상황입니다. 원종이 먼저 그들을 숙청하려 했든 배중손 등이 불안감에 먼저 선동을 했든 그건 다음 문제입니다. 당시 그들의 입지는 그렇게 불안정했습니다. 그냥 최씨의 개일 뿐이었다면, 대몽항쟁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숙청되면 그만이고, 그들의 난은 말 그대로 무신정권의 잔재일 뿐입니다. 반면 그들이 국가의 중앙군이었고 국가를 위해 정말 열심히 싸운 상태에서 그랬다면 이건 토사구팽으로 원종을 누누이 까는 이유가 되겠죠. 어느 쪽이든 원종의 대처가 너무 서툴렀다고 보긴 합니다만.
이렇게 양 쪽에 발을 디딘 상태에서 대몽항쟁이라는 자기의 자존심이 잘려나가는 상황, 나라를 지켰다는 자존심과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상황, 이 때 삼별초는 일어납니다. 임유무가 죽은 후 단 한 달만에 일어난 삼별초의 난에서 이런 불안감을 넘어선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신 그들은 또 다른 고려를 만들고 자신들이 정통이라 주장합니다. 그 고려는 자신들이 영웅으로 남는 고려였습니다. 자신들이 왕을 지켰고, 왕실을 지켰고, 곧 고려를 지켰다고 인정해 주는 나라였죠. 그냥 숨어 있었다면 몇 년 더 살았겠지만, 그러면 안 됐습니다. 모든 고려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까요. 아무리 위험해도 몽고에 숨으면 안 됐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원나라 군사까지 공격하며 자신들을 알려야 했습니다. 자신들은 "대몽항쟁의 영웅"이니까요.
저는 이 삼별초의 난을, 그들이 바랬던 목적을 "자신들이 대몽항쟁의 주역으로, 충신으로 남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정의하겠습니다.
그들을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특히 그들 자신의 이해 관계를 떠나 고려인들 전체로 시선을 넓혀 보면,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재건해야 될 고려를 계속 방해한 것에 불과하죠. 어떤 말로 꾸며 봐야 그들 자신의 자존심 문제일 뿐이긴 합니다. 하지만 단지 자존심으로 볼 순 없죠. 그들은, 특히 왕실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분명 대몽항쟁의 주인공이거든요. 지금 그들의 난을 대몽항쟁에 끼워 포장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것, 아마 이것이 그들이 만들려 했던 나라였을 겁니다.
결국 그들 탓을 하기보다는 그들을 그런 상황으로 몬 당시의 정치 상황을 먼저 탓해야 됩니다. 무신들을 차별했던 문벌귀족, 왕도 뭣도 아닌 실세가 돼고 사병을 양성한 무신정권, 그런 그들을 외세의 힘을 빌려 숙청해야 했던 원종까지... 삼별초 내로 그 비판을 확대하더라도 김준, 임연, 배중손 등 그들을 이끌고 정치 행위를 한 이들에게 한정해야죠. 이 때문인지 난을 일으킨 배중손보다 오히려 대몽항쟁에 가까웠던 김통정을 더 크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 둘을 어느 정도 분리해야 된다고 보구요.
그들을 좋게 평가할 순 없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나라를 위해 싸운 충신으로 남았을 그들이 반란군이 된 것은 결국 윗놈들 때문이었습니다. 박정희가 한 말 중에 이들에게 정말 어울리는 말이 있죠. 그 자신이야 자기를 포장하려고 한 말이었겠습니다만.
대몽항쟁부터 쓰고 쓰다 보니... 차라리 지금의 통설처럼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정말 남는 게 없거든요. 혼란한 시대일수록 영웅은 없습니다. 영웅을 바라면서 그 사람이 흠결 하나 없기를 바라는 심리는 영웅의 그림자를 무시하고, 그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영웅은 일개 범인으로 떨어지죠. 어느 정파를 가리지 않고 마찬가집니다. 어느 쪽이든 영웅화를 하고, 그림자를 가리며, 상대의 그림자를 부각시킵니다. 양 쪽 다 객관적으로 장단을 말하려 할 수록 영웅은 없어지고, 초라한 얘기만 남습니다. 전후 사정이나 개인의 사생활 등까지 모두 합쳐서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사에 정말 몇 없을 겁니다. 세계사에서도 마찬가지겠죠.
앞으로 얘기할 근대사에서는 그게 더 심할 겁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영웅은 없고, 긍정적인 부분이 부각된 사람일수록 부정적인 부분을 더 볼 것이고, 부정적으로만 묘사된 사람의 긍정적인 부분을 얘기하면 매도당하겠죠. 저 자신의 정치 성향 문제도 걸릴 거구요. 앞으로 글을 쓰는 게 걱정이 됩니다. 아마 저나 이걸 봐 주시는 분들이나 대몽항쟁 편보다 더 한 허무감을 느낄 것 같네요.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계속 쓰겠습니다.
그나마 좀 쉬어갈 타임이 됐네요. 다음 얘기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입니다. 고려의 막장 상황은 계속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 놓고 쓸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