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펌] 손님 푸대접의 결과
게시물ID : history_224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킬라칸
추천 : 13
조회수 : 1430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8/11 10:39:24
옵션
  • 펌글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p.142~149


닉슨은 정말 무서운 성격과 집념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우린 사소한 실수로 닉슨에 한을 제공해 끝내 그의 집권 6년간 숱한 굴욕을 감당해야 했다. 
닉슨과 한국과의 관계는 6.25 때까지 올라간다. 당시 아이젠하워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그는 한국전의 휴전을 바라보며 아시아에 눈을 뜨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후 1960년 케네디에게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하고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시자 세계의 언론은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 

'이제 닉슨은 끝났다"

그러나 결코 닉슨은 녹록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자신 존슨의 월남정책을 바라보며 차기 대권을 위해 히든 카드로 월남전을 연구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 근처라도 살펴야 하는 법. 1966년 홀연히 일어선 그는 월남을 이해하기 위해 아시아로 달려왔다. 닉슨은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돌아보며 뼈저리게 깨우친다.

'미국이 이해하기에 아시아는 너무 복잡하고 미묘하다. 때문에 앞으로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은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이른바 후일 '닉슨독트린'이라 불리우는 보검의 담금질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당시 닉슨의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작은 이런 움직임을 감지 못한 점이다.
동남아와 일본을 돌아본 닉슨은 월남에 병력을 파견한 한국의 표정을 살피려 1966년 9월 마닐라 정상회담을 한 달 정도 앞둔 때 1박2일의 짦은 여정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하나 그때만 해도 닉슨의 짦은 걸음걸이가 후일 우리의 목에 들어댄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정말로 나 이외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비극의 첫 걸음이었다.
아무리 주지사 선거에서까지 패했다지만 닉슨은 그래도 거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때문에 브라운 대사는 청와대 문을 두드려 박대통령과의 만찬을 타진했다. 그러나 국제감각이 무딘 박 대통령은 별로 탐탁찮게 여기곤 청와대 빗장을 좀처럼 열려 하질 않았다. 
'협상의 귀재'라 불리며 불과 두 달 전 나와 함께 '브라운 각서'를 만들며 월남 파병협상을 끝낸 브라운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급기야는 내게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각하, 지금 닉슨이 온 모양인데 사람팔자 알 수 없읍니다. 그를 비록 언론에선 끝났다고 냉대하지만 그래로 그는 아직 거물이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 다시 나설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침 그가 불우할 때니 지금 그를 후대한다면 결코 우리를 잊지 못할 겁니다' 

브라운 대사에게 떠밀리다시피 청와대에 들어왔지만 사실 나도 속으론 박 대통령이 닉슨을 꼭 만나 주었으면 싶었기에 강력히 닉슨과의 만찬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달갑잖은 표정이었다. 

'그 사람 이미 끝난 사람인데 구태여...'
'그래도 각하......'

속이 탄 내가 재차 건의했으나 여저니 박 대통령의 얼굴엔 찬기운이 감돈다. 결국 닉슨은 박대통령과 점심도 못하고 그저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로 끝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 될려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예상외의 예우에 몸이 단 브라운이 그날 저녁 급히 장관들과 함께 하는 만찬을 추진했는데 공교롭게 마침 같은 시간에 박 대통령이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 입에선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미 대사관 만찬장에 들어서니 미군 장성들과 함께 앉아있는 사람이라곤 불과 두서너 명에 불과하지 않은가. 
내 느낌으로도 시종 식사 내내 닉슨의 표정은 텅 빈 좌석만큼이나 공허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대로 두면 우리나라에 득될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난 식사가 끝난 후 닉슨을 넌즈시 찔러 보았다. 

'어떻습니까, 피곤하지 않으면 아직 시간도 초저녁인데 제가 기생집으로 모실까요?'
'좋소'

워낙 지루했던지 의외로 그는 쾌히 고개를 끄덕여다. 

'그럼 잠시후 브라운 대사와 함께 셋이서 가도록 하죠'

그러나 그날 하늘은 끝내 우리편이 아니었다.

'참, 저는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 가야 할 데가 있어서 좀 곤란한데요...'

닉슨을 보좌해 줘야 할 브라운이 난색을 표하는게 아닌가, 닉슨 혼자 간다면 사실 예우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내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자 닉슨은 할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여기서 이야기나 합시다'

결국 난 기생집 가는 걸 포기하곤 미 대사관에서 그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중략)...

아무리 그가 한물 갔다는 평을 듣는 정치인이라 해도 일국의 부통령까지 지낸 인물을 그렇게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일 얘기를 들었지만 닉슨은 동남아와 일본에선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 한다. 운명은 모르는 법이라 하여 모두들 닉슨을 최대한 예우해주며 미래투자를 한 것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자존심 세기로 소문난 닉슨이 한국의 경우와 비교 안할 리 없을 테고, 아마 잠을 자면서 이를 갈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역시 내 우려는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2년 뒤 1968년, 제 3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닉슨이 월남전으로 수세에 몰린 험프리를 누르고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만일 월남전만 아니었다면 험프리의 승리는 명약관화였다. 
닉슨이 당선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박대통령이었다. 

'그때 잘해줄 걸....'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예상대로 닉슨은 취임식이 끝나기 무섭게 '닉슨독트린'을 제창한다. 아울러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거론한다. 

'그까짓 한국 힘 없으면 망하라고 해. 무슨 상관이야. 일본만 자유민주국가로 남아도 충분한데...'

갑자기 청와대에 비상벨이 울리는 건 당연한 일. 당시 한국의 안보 기둥인 주한미군의 철수는 곧 국가와 정국의 혼란을 부를 건 뻔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박대통령의 정권유지차원이 아닌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까지 위협받게 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모든 루트를 다 동원해서 박 대통령과 닉슨의 면담을 주선하라'

한국의 정계는 발칵 뒤집혀졌고, 워싱턴행 비행기엔 우리 쪽의 밀사가 줄을 이어,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최규하는 물론 나까지도 워싱턴 정가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닉슨의 정책성도 좀 가미된 보복은 이때부터였다. 백악관 빗장은 커녕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도 허용치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끌기를 무려 반년. 그 사이 박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미국에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내주겠다는 등 추파를 던졌고 끝내 닉슨은 못이기는 척 입을 연다.

'그럼 좋소. 그러나 워싱턴에선 안되고 8월, 내 여름 휴가때 내 고향 근처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휴가때 별장으로 놀러가는데 그쪽으로 오라니...... 그것도 그의 고향인 샌클레멘티 집엔 그나마 헬리콥터 이착륙장까지 갖춰져 있어 박 대통령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시설이라도 있었으나 닉슨은 그것마저도 아깝게 여겨 샌프란시스코의 샌프란시스코호텔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무릎꿇고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이 차라리 더 나을 듯 싶었으나 이쪽이 잘못한 것도 있으니 어쩌랴. 박 대통령은 자존심의 눈물을 머금고 1969년 8월 21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당시 난 이미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던지라 후에 박 대통령으로부터 그때의 심정을 전해 들었다. 

'내 약소국의 비애를 옛날 케네디 친서 건으로 버거 대사에게 당한 것 이상으로 비참하게 맛보았소. 난 그날 비통함의 연속이었소. 약속시간에 맞춰 자동차로 호텔에 가면서도 난 최소한 호텔 로비에선 닉슨이 맞아주리라 기대했었소. 그러나 호텔 로비에서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릴때도,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닉슨은 나타나지 않았소. 내가 방에 들어선 후 왼쪽의 큰 문이 다시 열리길래 보니 그쪽 방 저끝 구석에 닉슨이 선 채 날 맞이하는 게 아니겠소. 물론 걸어오지도 않았고, 마치 속국의 제왕을 맞이하듯 했단 말이오. 그뿐만 아니오. 저녁식사 땐 시시껄렁한 자리 고향친구들 불러다 앉혀놓곤 같이 식사하라는게 아니겠소. 내 아무리 1966년 닉슨이 방문했을 때 섭섭하게 대했기로서니 너무한거 아니오'

이만큼 닉슨의 보복은 집요하다 못해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월남전을 끝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마닐라 정상회담에 의해 미국과 한국은 종전시에도 함께 협의하게 돼 있었다. 하나 닉슨은 이 약속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키신저를 시켜 월남전을 끝냈다. 
물론 미국 나름의 정책도 있었겠지만 결국 박대통령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후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닉슨의 1박2일'은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그 1박2일이 주한미군의 첫 철수를 낳았고, 그건 박대통령에게 위기의식을 안겨 줘 이후 10월 유신, 핵개발 등 자신의 불안을 보전해 줄 악수를 두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이후 카터행정부와도 사이가 안 좋았으며 미국과의 불화는 정국의 불안을 불러 결국 10.26까지 이어진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엔 분명 닉슨의 1박2일도 불씨의 하나였다. 
또한 워낙 닉슨의 심기가 칼날 같았기에 우린 월남 종전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미국에 눈치조차 한 번 못 주고 그대로 당해야 했다. 키신저가 북경과 파리를 오가며 레둑토 월맹대표와 노벨 평화상 문안을 작성할때도 우린 그저 쓴 맛 다시며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우린 월남전을 통해 경제적 실리 이상으로 정치,외교적 성과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격이었다. 
지도자의 사소한 판단, 특히 인간관계의 실수가 가져온 파장치고는 당시 크기위해 몸부림치던 약소국 한국에 '닉슨의 입김'은 피하지 못할 태풍이었던 것이다.



1. 윗글 중 '기생집'은 바로 '요정'을 말하는 겁니다. 그 시절 '요정정치'라는 말이 유행하는 마당에 브라운 대사가 이동운이 가자는 곳이 어떤 데인지 모를 리가 없었겠죠. 브라운 대사가 다음날 일찍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빠진건 닉슨과 그런 곳에 갔다가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아 일부로 핑계를 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제딴에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고 전 미국 부통령을 데리고 요정에 가려고한 당시 외무부장관 이동운의 행태도 참 할 말이 없습니다.  

2. 사람 일이란게 어찌될지 모르는데 박정희 입장에선 재수 없이 걸린 불가항력의 사태 아니냐고 변명할 수 도 없는게, 저 때 닉슨은 일본에서 천황과 오찬을 했고 프랑스에선 드 골이 레드카펫을 깔아주며 큰 환대를 했습니다. 덕분에 닉슨이 대통령으로 재직 당시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역사상 가장 좋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옆에서 외교 전문가가 강하게 조언을 하는데도 무시하다가 저런 사태를 야기했다는건 근시안적인 행태일 뿐입니다.

3. 당시 주한미군 병력 중에서 7사단과 3개 비행대대가 철수했습니다. 역사상 한국에서 박정희만큼 주한미군 철수에 '기여'한 인물이 없습니다.

4.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저 사건에 관한 내용을 누가 일베에 올려 놓았던데 아무도 댓글을 안달더군요.
출처 http://cafe.daum.net/Europa/3L0P/3927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