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삼별초의 대장으로 나타난 김통정은 이전까지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듣보잡이었습니다. 삼별초가 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기에는 그 위에 쟁쟁한 인물이 둘이 더 있었죠. 첫째는 남해도에서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유존혁, 원래부터 대장군에 좌승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끈 병력 역시 남해도에서 와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죠. 또한 제주도를 점거하고 있던 이문경 역시 있었구요. 이런 점에서 김통정이 대장으로 뽑힌 게 의문입니다.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주도 내에서 삼별초 간의 대립이 일어나 그 둘이 숙청된 것일 수도 있고, (그 후의 사료에 이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김통정의 능력을 알고 스스로 고개 숙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 삼별초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면 정말 큰 일이고, 얼마 뒤에 있을 대규모 공세 역시 설명할 수 없죠. 반면 이름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 김통정이 요직에 있었거나 차기의 실세로 예정된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해전에 능했고, 제주도로 온 이들 역시 계획된 후퇴라기보다는 수군이어서 더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라는 점에 걸고 싶습니다. 진도에서 삼별초는 뿔뿔히 흩어졌고, 수군이었거나 후방의 포구 등에 더 빨리 도착한 이들만 탈출할 수 있었을 것 같거든요. 자기들이 내세운 왕온은 물론 자기 가족, 인질들도 모두 버리고 온 길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그가 이제까지 삼별초의 활동에서 특히 수군으로 나름 활약을 하지 않았으면 대장이 될 수 없었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제주도로 후퇴한 삼별초는 깊은 침묵에 빠집니다.
그 동안 고려에서는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을 주고 본격적으로 일본 정벌 준비에 착수합니다. 세자 왕심이 인질로 몽고로 떠났고, 일본을 칠 준비하라는 몽고와 동녕부 돌려달라는 고려의 외교전이 계속됐죠. 몇 차례나 요구했던 세자 왕심과 쿠빌라이 칸의 딸과의 결혼도 이루어집니다. 부마국의 시작이었죠.
그런 가운데서 10월 다루가치 탈타아가 죽습니다. 그의 최후 역시 인상 깊습니다. 원종이 그 소식을 듣고 약을 지어 갖다 주니 그걸 거부하며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탈타아가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 병은 거의 회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이 약을 마시고 죽는다면 그대 나라를 참소하는 자가 필시, ‘고려에서 독약을 먹여 죽였다.’ 할 것이다.” 하면서 약을 마시지 않고 졸하니, 국인이 애석하게 여겼다."
따지고 보면 조선총독부나 다름 없었던 탈타아, 하지만 당시 고려에서 그만큼 고려 내부의 문제와 여몽 갈등을 잘 중재한 이도 없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홍다구 등으로 인해 다시 전쟁이 일어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고려는 더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겠죠. 이 정도면 은인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고려인이 아닌 고려를 지배하러 온 몽고인이라는 게 정말 신기할 따름이죠.
그가 죽은 후, 몽고의 수탈은 더 심해집니다. 부 다루가치 초천익은 진도 토벌 당시 고려군이 쓰던 병기를 다 챙겨 갔고, 말 사료를 한 호마다 두 섬으로 정하니 백성들이 도망가 한 섬으로 줄여야 했습니다. 12월에는 흔도가 말먹이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고려의 허실을 떠 보며 독촉했죠.
+) 이 해 12월 몽고는 국호를 원이라 정합니다. 이제부터 원나라라 칭하겠습니다.
1372년 3월, 전함병량도감이 설치되며 여기서 일본 정벌을 위한 배를 관리하게 됩니다. 이어 전함조성도감이 설치됐는데, 어이 없게도 이는 대장경을 담기 위한 배를 만들기 위해 설치된 거였습니다. 원나라 황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죠 -_-; 원의 중서성에서 이추가 파견돼 큰 목재 35그루를 바쳐야 했고, 그는 배 10척에 목재를 나누어 싣고 고려에서 긁어 모은 노비와 재물, 금은보화도 같이 싣고 갑니다. 그가 오죽 깽판을 쳤는지 고려에서는 장군을 제수하여 비위를 달래야 했습니다.
그 직전인 2월에는 세자 왕심이 원에서 돌아옵니다. 문제는 그가 돌아온 핑계였죠. 애초에 고려로 돌아오고 싶어했던 건 그나 주위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고, 주변에서는 일본 정벌을 핑계로 고려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설인검, 김서 등이 이렇게 반대하죠.
"여기에 있는 것은 장차 사직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이제 이 일로 청원하여 돌아간다면 나라가 그 폐해를 입을 것이니 어찌 사직을 보호함이 되겠습니까?"
일본 정벌을 핑계로 돌아가면 원의 요구가 더 심해질 거라는 거였죠. 세자 역시 이 말을 듣고 포기합니다. 문제는 임유간이었습니다. 그는 임연의 아들이자 임유무의 동생으로 임연이 원종을 폐위했을 때 그걸 변명하려고 원에 와 있다가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 생각인 것처럼 쿠빌라이 칸에게 말 해 고려로 돌아가려 했죠. 일이 이미 틀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세자는 짐을 직접 지기로 합니다.
"지금 일본만이 황제의 교화를 입지 못하여 전함과 군량이 현재 필요하니, 만일 이 일을 신에게 맡긴다면 거의 심력을 다하여 왕사를 돕겠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세자, 사람들은 그가 변발을 하고 몽고옷을 입은 것을 보고 탄식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삼별초가 토벌된 후에도 고려는 그들이 제주도로 간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은근슬쩍 여러 섬에 다시 진출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죠. 하지만 고려에서는 원에 그들을 마저 토벌해 달라는 말 외에는 하지 못 했습니다. 제주도는 너무 멀었고, 고려가 자력으로 뭘 할 수 없었죠. 몽고에서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으며 닥달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삼별초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전함병량도감이 설치된 3월, 회령(전남 장흥)에서 조운선 4척이 나포됩니다. 이어 5월에는 탐진현(전남 강진)이 공격 당했고, 이어 낙동강을 거슬로 올라 대포(경남 창녕)까지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조운선 13척과 실려 있던 쌀도 모두 약탈당했죠. 이 때 경상도에 투입됐던 간첩들이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6월에는 삼별초가 안행량 (태안 반도 쪽)을 거슬로 올라간다는 소문에 개경이 두려움에 떨 정도였습니다. 급히 나유를 보내 전라도의 적을 토벌하려 했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삼별초의 방식은 바뀌었습니다. 관군이 오기 어려운 제주도에서 수군만을 보내 철저히 게릴라전을 벌인 것이죠. 몇 달 동안 그들에게 뺏긴 쌀만 3200섬이었습니다. 조정은 또 쌀이 올라오지 않아 원종도 굶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원에서도 한창 정벌을 위해 모으던 군량을 뺏긴 상황이었습니다.
급히 고려에서는 삼별초를 다시 회유하는 조서를 보냅니다. 하지만 삼별초는 그들을 붙잡은 다음 한 명을 남기고 다 죽인 후에 이런 말을 전하게 합니다.
"너희가 전에 진도로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꾀어 마음을 늦추게 하고서 대군을 끌어들여 공격해 깨뜨렸으므로 우리의 원한이 뼈에 사무치는데, 이제 또 와서 꾀려 하니 남김없이 죽여 마땅하나 그렇게 하면 이 일을 누가 가서 알리겠느냐!"
왕온이라는 자기들이 세운 왕도, 대몽항쟁이라는 대의명분도, 힘들게 쌓았던 터전까지도 모두 잃은 그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갈 곳은 없었습니다. 제주도에 틀어박혀만 있었다면 그나마 조금 더 시간을 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런 가운데서도 다시 싸우는 것을 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