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당시 쿠빌라이 칸은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도 임연의 잔당일 뿐이라고 보고했었구요. 오히려 그는 황제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는 건지 회유하는 조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1271년 초에도 아해가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환한 것 외에 딱히 신경 쓴 게 없었죠. 대신 일본에 빨리 사신을 보내고 정벌 준비를 하라고 고려를 다그칠 뿐이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삼별초가 방어에만 치중했거나 몽고에 알아서 기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죠.
1. 바다는 우리 것이다 몽고와 고려의 조서를 가지고 온 박천주는 진도로 건너갑니다. 이 때 배중손은 특이한 대처를 합니다. 몽고 사신 두원외는 억류하고 박천주만 환영한 것이죠. 쿠빌라이 칸의 조서 역시 "내가 받을 게 아니다"면서 거절하고, 원종의 조서는 "명에 따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같은 고려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는 이미 왕온을 왕으로 앉힌 상황, 원종의 명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죠. 이간책이라고 볼 수밖에요. 당시 홍다구는 계속해서 고려를 완전 점령해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배중손이 이를 알았든 몰랐든 고려와 몽고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건 나쁠 게 없었죠. 실제 박천주를 대접하는 동안 20척으로 관군을 기습합니다. 다행히 김응덕이 맞서 싸워 한 척을 노획하기는 했습니다만.
+) 나주 쳐들어올 때 7일 동안 버텼던 그 사람입니다. 1척을 노획한 게 그 때가 아니라 이 떄였네요.
그 동안 고려 내부에서는 몽고군이 속속 증원되며 일본 정벌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기 주둔을 위해 둔전까지 시작했죠.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에 호응하는 반란이 시도됩니다.
시작은 밀성(밀양), 방보, 계년 등이 부사 이이를 죽이고 공국(功國)병마사라 칭하며 주변에서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진 않았습니다. 인근의 청도 감무를 죽이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청도 사람들은 오히려 술을 먹인 후 그들을 죽입니다. 일선 현령 조천이 원래 밀양 사람이라서 그에 호응하려 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생각을 바꿔 반란군을 평정하려 합니다. 이 때 안찰사 이오가 금주 방어사 김원을 보냈고 반란은 조기 진압되죠. 다만 이들이 삼별초에 호응한 게 아니라 그저 그들의 이름을 내걸어 반란을 일으킨 거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한편 관노 숭겸, 공덕 등도 관리를 죽이고 진도로 가려 했는데 대정 송사균이 이를 알고 조정에 알립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제대로 대응을 못 하고 있었죠. -_-; 원종도 기가 찼겟지만, 그도 아무것도 못 하고 대신 다루가치 탈타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탈타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게 이 때입니다. 그는 대신들을 모아 놓고 숭겸 등 10명을 심문한 후 4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놓아 줍니다. 노비 몇 명의 반란 하나 제대로 대응 못 해서 그가 결정해야 했을 정도였던 겁니다.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 그가 조금이라도 그릇된 사람이었다면 세상은 더 힘들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많이 달랐죠.
홍다구는 탈타아까지 끌어들여 고려를 점령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탈타아는 끝까지 거부했고, 오히려 홍다구의 움직임을 철저히 막습니다. 그건 뒤에 다시 쓰겠습니다.
+) 이전에도 탈타아의 이름이 나오는데, 유천주라는 이가 벌을 받아 귀양 가니 그의 어머니가 "유경이랑 죄가 같은데 우리 아들만 벌을 받았다. 사면시켜 달라"고 요구한 부분입니다. 탈타아는 그 말을 듣고 풀어주기는커녕 유경도 같이 귀양 보내 버립니다 -_-;
대부도에서도 반란이 일어납니다. 애초에 삼별초 토벌을 명분으로 몽고군이 들어와서 약탈을 한 번 한 지역이었죠. 기존에도 삼별초의 활동무대여서 친삼별초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숭겸의 난을 듣고 몽고병들을 다 죽였고, 이 소식을 들은 수주 부사 안열이 토벌합니다. 이 뒷처리를 한 것 역시 탈타아였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삼별초는 남부지방 곳곳을 찌릅니다. 2월에는 조양현(전남 보성)을 공격해 약탈한 후 배를 불태우고 달아납니다. 방어도령으로 임명된 진정은 자원해 놓고 놀기만 했다고 합니다. 이어 3월에는 합포현(경남 창원)을 공격합니다. 4월에는 김해를 쳤는데, 방호장군 박보는 산성으로 피할 뿐이었죠. 이 의미는 컸습니다. 합포는 일본 정벌을 위해 몽고군이 주둔한 기지였습니다. 이 곳을 쳤다는 건 곧 몽고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 뿐 아니라 일본 정벌도 방해하겠다는 얘기가 됐죠. 당하고 있는 고려는 물론, 쿠빌라이 칸이나 아해 대신 파견된 흔도도 가만 있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삼별초가 지배한 섬만 30개, 바다가 삼별초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삼별초는 고려 몰래 몽고와 직접 교섭하기를 요구했습니다. 이 때 그들은 토벌군을 물려주기를 요청하며, 한 가지 카드를 제안하죠. 전라도 할양이었습니다. 고려에서 전라도를 떼어 주면 동녕부처럼 몽고에 귀속돼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안 될 거 같자 요구한 것이었는지, 이전처럼 이간책의 일종인지,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임용한 교수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점쳐 본 것일까?"라고 의문을 표시했죠. 이거 하나로 대몽항쟁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는 것과 함께요.
어느 쪽이든 흔도는 이를 거부합니다. 후에 보고를 받은 쿠빌라이 칸 역시 시간을 끄려는 작전일 뿐이라고 평가했죠. 토벌군은 계속 준비돼고 있었습니다.
2. 토벌군 당시 고려 본국의 상황은 여전했습니다. 일본을 치자는 쿠빌라이 칸의 요구는 계속 됐고, 고려에 병력이 없다는 핑계로 몽고는 장기 주둔할 목적으로 둔전을 만들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약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비의 반란도 제대로 대응할 능력이 없었던 고려가 그들에게 대항할 순 없었죠. 반란도 계쏙돼서 강원도 양양에서는 백성들이 수령과 아전들을 죽이려다 발각된 후 쌍성총관부에 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_- 결국 이 지역의 백성 1천여명이 쌍성총관부에 흡수됩니다.
몽고에서는 자기들이 둔전하는 데 필요한 군량, 말, 말먹이를 모두 고려에 요구했습니다. 농사에 동원되는 소의 경우 6000마리 중 절반은 몽고에서 값을 지불하고 나머지 절반은 고려에서 지불하게 했죠. 홍다구는 여기서도 큰 활약을 합니다. 그는 언제나 고려에 병력이 많고, 물자도 아주 많고, 언제나 몽고에 반기를 들 것이니 군사로 점령 안 하면 위험하다고 해 왔거든요 -_-
이런 것에 제동을 건 것은 고려인이 아니라 몽고에서 파견된 다루가치 탈타아였죠. 그는 이렇게 말 합니다.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우리 군사가 각 고을을 약탈하여 백성이 부지하여 살 수 없는 형편이니, 여러 도에 안무사를 보내십시오"
그제야 원종도 장일, 주열, 곽여필을 하삼도에 보냅니다. -_- 이즈음에는 임유무를 죽인 홍문계도 조정에 썩은 관리들이 많다는 이유로 사직했고, 원종이 정사를 보지 않고 일을 환관에게 맡긴다고 그를 탓 하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습니다.
원종도 의욕이 안 날 만도 했습니다. 수십년 동안 복구해도 될까 말까인데 몽고의 요구는 언제나 가혹했고, 진도에 삼별초가 자리잡은 이상 그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수운을 가동시킬 수 없었습니다. 뭘 하려 해도 할 방법이 없었죠. 이 때는 관리들에게 내릴 녹봉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병력을 어떻게 마련해야 했습니다. 당시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몽고군은 5000명, 여기에 홍다구가 지휘하는 고려, 여진, 거란인 등으로 구성된 부대가 2000명이었습니다. 영녕공 왕준도 아들 둘에 400을 딸려 보냈구요. 고려가 부담해야 될 병력은 6000,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도 없었고 물자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결국 각 도의 산직(명예직) 관리, 노비, 백정부터 승려까지 다 긁어모은 후에야 가능했죠.
이 때 나선 게 또 탈타아입니다. 그는 충청, 경상도에서 어떻게든 병력을 끌어내어 정원을 맞추고, 그들에게 필요한 말을 댑니다. 바로 대신들에게서요. 고려군에서 대신들의 자제는 없었고, 그들에게 책임지라고 한 거였습니다. 또 격군이 없어서 4품 이상의 관리에게 노비 1명씩을 빼게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참 필요했을 때죠. 애초에 그들 자신이 했어야 했던 일, 아니면 원종이라도 해야 했던 일, 그걸 하게 한 것은 고려를 지배하기 위해 온 몽고인 탈타아였습니다.
이래저래 참 힘들게 1만의 여몽연합군이 만들어졌습니다. 동원된 군선은 모두 1백여척, 목표는 삼별초의 본거지 진도였습니다.
3. 진도 함락 그렇게 5월이 다가왔습니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시간을 벌기 위해 삼별초와의 협상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중군은 김방경과 아해를 대신해 투입된 흔도, 좌군은 홍다구, 우군은 김석과 고을마였습니다. 때는 5월 15일, 1만의 병력이 세 방면으로 상륙을 개시합니다.
이 때 삼별초는 요격할 엄두를 내지 못 했습니다. 100척이라고 하지만 큰 배 혹은 전투선만을 말한 것일 뿐 그 이상일 수 있을 듯 합니다. 진도는 육지와 너무 가까웠고, 삼별초는 여전히 소수였죠. 거기다 삼별초는 전선을 너무 벌려 놨습니다. 남해도부터 거제도 등 경상도 각지의 섬을 함락시켰지만 이는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분산시켜 놓은 것이었죠. 여몽연합군은 그걸 하나하나 토벌하는 대신 머리가 있는 진도를 직접 친 것이구요. 계속되는 승리로 방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무능했던 아해 대신 파견된 흔도, 매국노로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은 홍다구는 그래도 능력은 충분했습니다. 작전도 참 잘 짰죠. 삼별초의 방어는 가장 대규모였던 중군에 집중됐고, 그 틈을 타 홍다구의 좌군이 장항에 기습 상륙합니다. 김석과 고을마의 우군 역시 상륙 후 용장산성으로 공격해 들어갔죠.
중군이 상륙한 곳은 바로 그 벽파진, 좌군이 불을 지르며 공격하자 삼별초는 후퇴하다가 우군을 만났고, 우군은 오히려 이들에게 밀려 중군 쪽으로 후퇴합니다. (...) 이 틈을 타 삼별초는 우군의 배 두 척을 불태운 후 도주합니다.
인질이고 자기 가족이고 모두 버리고 도주하는 삼별초, 관군은 그들을 쫓으며 관리의 처자식들을 구출했고, 삼별초의 처자식들을 붙잡습니다. -_-; 김방경이 구출한 이들만 1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려군에게 잡혔으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겁니다. 홍다구와 흔도에 잡힌 사람이 어찌 됐을지는 굳이 고민할 필요 없으니까요.
승화후 왕온은 이 때 홍다구에게 붙잡혀 아들 왕환과 함께 죽습니다. 그의 동생이 바로 영녕공 왕준이었습니다. 그는 형을 구하기 위해 아들 둘을 참전시켰고, 그들이 좌군에 배속됐음에도 홍다구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왕준은 이에 대해 아무 항의도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별초의 주 퇴각로는 둘로 갈라집니다. 사료에는 배중손을 잡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배중손은 남서쪽의 남도석성에서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합니다. 원사에서는 삼별초를 위협에 못 이겨 삼별초를 도왔던 진도 주민들이 항복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 때가 7월입니다. 그 후에도 2개월간 진도 전체에서 전투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죠.
이렇게 삼별초의 뿌리가 뽑힙니다. 김방경, 흔도, 홍다구는 많은 노획물과 구출된 주민들을 데리고 개선하죠. 하지만 역시 홍다구가 또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잡은 포로에는 관리의 처자식과 진도 주민들까지 있었지만, 이들이 삼별초의 잔당이라며 그대로 몽고로 잡아 가려 했습니다.
원종은 상장군 정자여를 파견하여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했고 당연한 얘기였기에 쿠빌라이도 들어줬지만, 흔도는 듣지 않습니다. 이 때 또 나선 것 역시 탈타아, 그는 흔도를 직접 찾아가 한 바탕 싸운 후에 포로들을 돌려보내겠다는 확답을 듣고 옵니다. 물론 돌아온 이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이들도 그리 편치는 않았습니다. 물론 자식들이야 이산가족 상봉하는 기분으로 만났지만, 관리의 아내들은 버려졌죠. 뭐... 너무 익숙한 광경이죠? 관리들은 이미 새장가를 들었고, 적의 손에 더럽혀진 아내를 다시 맞기엔 그들이 너무 고귀했나 봅니다. 토벌군으로 활약한 나유 정도만이 자기 아내를 먼저 찾아 다시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삼별초의 난은 거의 진압됐고, 쿠빌라이 칸과 흔도는 다시 일본 정벌 준비를 요구합니다. 고려는 감당할 수 없는 물자를 준비해야 했고, 몽고군에게 바칠 쌀과 말먹이 때문에 추수철에도 백성들은 초목근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진도를 탈출한 김통정은 제주도로 향합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 때, 그는 삼별초를 재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