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다른 시대간의 비교글을 쓰는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으나,
감히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혜악이 국가적으로 너무나 컸기에 이를 알리고자 글을 적습니다.
1. 고려의 원래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나?
송나라는 60만 병력동원이 가능하다고 파악했다
1123년 송나라 황제 휘종이 고려에 파견했던 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서긍은 고려에 대한 정보를 망라한 "고려도경"에서 고려 군액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의 병력수 30만의 두 배인 60만 정도로 파악하였다. 서긍이 고려를방문한 때는 북송이 금 金 나라에 멸망하기 전으로 송나라 사신 일행은 금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지원병파견을 교섭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각종 군사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던 송의사신 서긍이 고려 병력을 60만이라고 파악한것은 전쟁 발발 시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으로 여겨진다. 고려의 군사조직은 이미 중앙정규군인 2군 6위와 지방군인 주현군/주진군으로 정비되었고 여진과의 전투에서 효과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격부대로서 별무반이 창설된 상태였다
2. 무신정권 성립후 얼마나 군사력이 무너졌나?
몽고와 30년 전쟁동안 중앙군이 동원된게 단 한번이었으며, 초적(산적) 을 중앙군에 편입시킬 정도였다
12세기 초반 고려의 군사제도나 군사력은 1170년 무신란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고려 중기 이후로 군인전 軍人田의 침탈로 2군 6위의 경제 기반이 무너지면서 군사 제도는 와해될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인 집권 시대에 극도로 비대해진 사병 私兵 집단은 고려의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196년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도방을 부활해 ‘ 6번 도방’이라는 경호조직으로 재편성하였다.
도방은 종전보다 더 체계화된 사병 집단으로 탈바꿈했고 최충헌 정권의 중핵을 차지하였다.
최우는 이를 내도방 외도방으로 확대 개편했고 야별초 夜別抄 라는새로운 조직까지 추가하였다. 이와 같이 최씨 무인정권이 양성한 사병 조직은 결국 중앙군의약화를 촉진시켰다.
항간에는 “그 때에 용감한 자는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 門客 이 되었고 관군 官軍 은 모두 노약하고 지친 병졸이었다 ” 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 점은 고려가 년간의 몽골 전쟁기간 중 중앙군을 조직해 몽골에 대항한 것이 1231년 제1차 전쟁 단한차례였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동선역 전투에서 승리의 돌파구를 마련한 초적은 정부의 학정에 대항하여 궐기한 농민군인데 5천여 명이 자원해 참전한 것이다.
같은 달 최우는 광주 관악산 초적 50여명도 적극 유치해 중앙군에 편입시키는 조치도 취하였다
3. 최씨 무신정권은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강화도 천도를 단행했나?
단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러나 최우는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강화도 천도를 결행하였다 최우가 천도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몽골이 다루가
치를 설치해 내정간섭을 시도하면서 국내 정치 상황마저 최씨 정권에게 불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4.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에서 국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나?
강화도만 열심히 지키고 나머지는 도망가라고 했다.
1235년에는 지방에서 소집한 예비 병력을 동원해 강화도 해안 및내지 연안에 제방을 쌓고 1250년에 둘레 2천 9백여 칸의 중성 中城을 쌓아 견고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에 비해 최우가 국토방위와 백성 보호를위해 내린 조치는 여러도에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산성과 바닷가 섬[海島]으로 들어가도록촉구한 것뿐이었다. 최우가 천도를 논의할때 참지정사 유승단 兪升旦 이 “성곽을 버리고종묘사직을 돌보지 않고 섬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월을 보내면서장정들을 적의 칼날에 다 죽게 하고 노약자들이 끌려가 노예나 되게 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 고 했다.
5. 전국토가 초토화되는 상황에서 최씨 무신정권은 왜 전쟁을 지속했나?
개경으로 출륙하여 돌아가면 무신정권의 종말이 오기때문에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이후로 전쟁에투입할 중앙군을 더 이상 조직하지 못하였다.
방호별감 등 관리를파견해 항전을 독려하거나 소규모 정부군과 야별초 파견에 의한 항전 지원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 규모로는 고려군이 전세를역전시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가 쉽지 않았고 장기전을 치루겠다는 항전의지만을 불태웠다.
무인 정권은 정치권력의 유지와 대몽전의 지속적 수행이 상호 연관을 맺는 상황에서 전쟁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이다
6. 몽골과의 전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가?
엄청난 인명피해와 방화, 약탈, 사서/사찰을 비롯한 문화재 소각
1차 침공 당시 기록에 의하면 "선봉군이 예성강에 이르러 집을 불 지르고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3차 침공부터 몽골은 전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 국토로 전장을 확대시켰고 강화도와 인접한 경기 서해도 지역을 집중 공략해 강화도를 압박하였다.
몽골은 기동력을 이용해 고려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전 국토를 파괴 유린하였다.
이 때문에 몽골 전쟁은 “ 몽골군이 지나간 곳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는 표현처럼 참혹하고 잔인한 양상을 보였다
이 해(1254년)에 몽골군의 포로가 된 고려인은 남녀 합해 20만 6천8백여 인이며 살육당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군 난리가 있은 이래로 이때처럼 혹심한 피해는 없었다
1253년 몽골 사자 몽골대 蒙古大 가 승천부에서 고려 국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우리 대군이 국경에 들어온 이후 하루에 죽은 자가몇 천 몇 만 명입니까 왕은 어째서 한 몸만 아끼고 만민의 생명을돌아보지 않습니까 왕이 만일 일찍 나와서 맞이했더라면 어찌 죄없는 백성들이 참살되었겠습니까 ” 라고 말했듯이 고려 백성의 희생은 살육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참혹하였다.
아래 침공기간중 진격로에서 보이듯이, 몽골군은 고려 전역을 휩쓸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7. 육지에서 백성들이 죽어나갈때 최씨 무신정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먹고 마시고 놀았다
최씨 정권의 강화도 생활상에 대해『고려사절요』에는 “최우가 종실과 대신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비단으로 산더미처럼 높은 장막을 만들고 가운데에 그네를 매었다 비단과 꽃으로장식하고 팔면을 은단추와 자개로 꾸미었다 ”고 적고 있다
8. 목숨바쳐 승전을 일군 영웅은 어떤 대우를 받았나?
너무 잘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231년(고종 18년) 정주 분도장군(分道將軍)이었던 김경손은 몽골의 1차 침입 때 몽골군이 귀주성에 당도하자 귀주성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의 10만 대군을 격파했다고 고려왕조실록은 기록한다.
서북면 병마사 박서와 함께 귀주성의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237년 전라도지휘사로 재임하면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해 추밀원(중추원의 후신)부사가 됐다. 1249년 장군의 명망이 높아지는 것을 꺼린 실권자 최항(崔沆)의 시기를 받아 백령도로 유배당했고 2년 후에 최항이 정적을 제거할 때 유배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9. 최씨 무신정권때문에 얼마나 민심이 이반됐나?
백성들이 관리를 죽이고 땅을 몽고에 바쳐서 쌍성총관부가 성립될 정도였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이 권장한 입보책은 정부 차원의 대책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식량문제 등으로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고 결국 민심 이반을 가져온 것이다.
반격 능력이 현저히 약화되는 전쟁 말기인 1250년 이후로 일반민들이 관군이나 항몽전을 수행하는 관리들을 살해하고 몽골에투항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 하나의 사례로 1258년 몽골이 화주 영흥 이북 땅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것도 동북면 주민들이 관리들을죽인 후 철령 이북의 땅을 몽골에 바치고 귀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0. 그래도 그 덕분에 팍스 몽골리아 체계에서 유일하게 자주성을 유지했지 않나?
최씨 무신정권이 의도하고 한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 살기위해 강화도에 있었을 뿐이다.
그건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백성들이 이룩한 업적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가장 무능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가고 국토가 불타는데 강화도에서 잔치나 벌이며 수수방관했던 정권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조선시대 선조는 성군이라고 부를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