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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검술 vs 서양의 펜싱 떡밥에 관한 캡틴 프랜시스 브링클리의 기록
게시물ID : history_223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5
조회수 : 175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8/07 21: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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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니라 나갤 관람하다 깜빡한 떡밥 하나만 쓰고 감;;

일본 검술과 서양의 펜싱이 대결하면 어느쪽이 이길까? 라는 떡밥에 대해서

예전에 서양검사와 일본검사가 각각 10명 씩 1대1 대결을 벌인 적이 있다. 승부는 먼저 상처를 입힌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여 승자가 많은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였다. 그 결과 승부에서는 서양검사들이 승리하였으나 사망자 또한 서양측이 많았다. 서양검사들이 승리할 때에는 대체로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지만 일본검사들이 벨 때엔 일격으로 베어버렸기 때문에 상대는 그대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의 개화기때, 펜싱을 배운 서양의 선원들과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시비가 붙어서 간혹 싸웠는데 대부분 펜싱하는 사람들이 이겼다


머 이런 썰이 종종 돌아다니져. 사실 이거 다 근거없는 뜬소문. 서양 검술과 일본 검술 간의 접점이 될 수 있는 시대가 한정적이다보니, 이런 류의 억측의 무대 역시 그 시대적 배경이 무척 좁구 그나마 제일 그럴듯하게 먹힐만한 것이 아무래도 개항기 메이지 시대(1868~1912)겠지효

저 시기, 19세기 후반의 검술은 이미 아카데미 펜싱, 클래시컬 펜싱의 시대이며 올림픽 게임의 종목으로 채택되던 시기의 국가 스쿨 위주의 펜싱이 벌어지는 시기이며. 어거튼 캐슬 같은 연구가/검객들의 시대이기도 함미다. 유럽의 기록은 물론이고, 일본의 메이지 시대도 기록이 충실히 매겨지는 시대이므로 근거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저런 떡밥은 왠지 명확한 리퍼런스 없이 돌아다니고 있슴미다

사실 서양의 선원들이 (찌르는) 펜싱을 구사했다는데서부터 쫌 ㅡ,.ㅡ;; 해군이나 선원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검술은 찌르는 검술이 아니라 사브르, 커틀라스, 바스켓힐트 브로드소드 계열의 베는 검술이었고, 연습도 싱글스틱을 휘두르면서 놀았져. 머 만에 하나 그 '선원' 즉 뱃꾼들이 어디 고명한 학교 출신이라, 에페를 사용하는 정통 교육 검술을 전수받았을지도 모르지만 흠...


여튼 그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 문화를 소개한 인물이 한명 있슴미다. 일본검술 vs 펜싱 떡밥에 대한 논란 중에, 그 원전을 그나마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는 사료를 하나 소개하구 갈까 함미다

일단 이 이야기를 쓴 인물에 대해 소개하자면...

캡틴 프랜시스 브링클리(Francis Brinkley)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40년도 넘게 지내면서 여러 글을 쓴 군관, 저널리스트이자 학자입니다. 그가 영-일 사전과 교재를 만들어서, 메이지 시대에 영어를 공부하려는 이들은 그의 책으로 공부를 했지효

그는 영국군 포병장교로 복무하면서 군 경력을 쌓다 1866년 홍콩 총독이던 친척의 초청을 받아 홍콩으로 가기로 했는데, 홍콩으로 가던 길에 일본 나가사키에 들렀다가 두 사무라이가 서로 결투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됨미다. 승자가 패자를 베어 죽인 다음 자신의 하오리(상의)를 시체에 덮어주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처럼 손을 모으는 것을 보고, 그는 일본 무사의 도덕률에 관한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 자리잡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다구 하네여

1867년 그는 다시 일본으로 와서 일본에서 영-일 공사관에 붙어서 (영국 포병장교 직위도 유지한 채로) 공사관부의 수행원으로 복무하고, 평생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871년에는 메이지 정부의 요청을 받아 어드바이저로서 일본제국 해군에 포술을 가르치고, 1878년에는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함. 같은해 사족인 미토 가문의 딸 다나카 야스코와 결혼. 사실 당시의 일본 법률 상으로는 둘의 결혼은 합법이 아니지만, 그는 영국 법에 의거해 정당하게 결혼했으며 또한 주변의 힘이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적법이라고 주장했슴. 휘하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아들 역시 일본 문화와 교육에 기여를 했다고 함미다
1881년부터는 지일파로써 일본에서 신문 (Japan Mail)에 글을 기고하고, 청일 전쟁시기 부터는 런던의 더 타임즈의 주일 필진으로 러일 전쟁의 급보를 날리기도 한하구여. 그가 임종시까지 마지막으로 쓴 글은 일본의 메이지 천왕이 죽자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일본 육군의 장군인 노기 마레스케가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했다는 기사였슴미다
1912년 노기 마레스케가 죽은 뒤 한달 뒤 시점에서 그도 사망합니다

뭐 대충 이런 인물... 영일간의 문물에 대한 여러 기고를 많이 하고, 메이지 정부에게서 지일파로 표창도 받고 그런 사람이져. 그가 쓴 일본과 중국의 문물에 대한 글은 서양인이 일본 문화를 살펴본 초창기의 글로 한번 봐둘만 함미다.

그런데, 그가 쓴 글 중에 일본의 검객과 레이피어 검술이 대결하면 어떻게 될까 라는 것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가 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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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자르고...

일본과 유럽 식의 검술 간에 어느 쪽이 나을지 토론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일본의 검객은 스스로를 숙련된 레이피어로부터 완전히 보호할 수 없을 거라는 점이다. 반면에, 레이피어로써는 일본 검객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일본 검객)는 아마도 상대가 패리하거나 찔러오더라해도, 베기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검술의 형태에 대해서 제법 인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럴듯하져? 그의 일본과 서양의 검술 비교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실제적임미다. 현대의 WMA/RMA 수련가들도 이 관점에 동의할듯.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 가서 여러가지로 일을 겪고 이름난 일본통으로써 기사를 쓴 인물인 프란시스 브링클리도 서양인과 일본인 간의 결투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저때부터 저런 떡밥이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이만 ㅃㅃ

출처 http://egloos.zum.com/odukhu/v/2350232

출처는 백돼지님의 동명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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