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어색한 사진이라는 게시물을 보고 감창숙 선생님이 누구신지 검색하다가 좋은 글이 있어서 퍼와 봅니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이 TV에서 이 글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김창숙 선생의 이름은 까먹고 있었네요. ㅎㅎ
이 제문은 심산선생께서 바로 아래 여동생 성산이씨 부인의 탈상 때 지은 제문으로, 당송 팔대가의 문장 중에 한퇴지(한유)의 조카에 대한 제문(際十二郞文)이 천하의 명문(名文)으로 회자되고 있으나, 많은 학자들이 이르기를 제 십이랑문을 능가하는 명문으로 이 제문을 읽고 울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 제문을 읽을 때 마다 슬픔을 참지 못하였는데 며칠 전 들으니 심산기념관이 곧 완공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참지 못하여 다시 심산유고를 읽다가 이 제문을 카페에 올린다
심산선생께서 1955년 영주 우리집에 오셔서 2개월 정도 계셨는데 그때 사위이신 나의 조부(장세형)는 영주중학교 서무과장으로 재직 중이셨고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 였는데 선생께서 계시는 동안 사랑채에 손님이 끊이지를 않았고 때때로 나를 불러 손님들에게 인사를 시키신 기억이 난다.
중매(仲妹) 성산이시 부(婦) 영전에
정유년(1957) 11월 14일 경진(庚辰)은 우리 중매 유인 이씨부(李氏婦)가 세상을 떠난 두 돌이다. 전날 저녁 기묘(己卯)에 동복형 절름발이 늙은이 창숙이 손자 위(暐)를 데리고 병을 부축하고 슬슬 기어서 영궤 앞에 와서 곡하고 한 잔을 부어서 고한다.
아! 슬프다. 군이 죽고 나는 살았는가. 죽고 사는 것이 크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인데 나는 지금 죽기를 빌어도 죽지 않으니 군의 죽은 것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의 죽지 않는 것을 슬퍼한다.
나는 상정에 반대되는 사람인지, 생각하면 내 동기가 다섯인데 위로 한 누님(姉)이 있고 아래로 세 매(妹)가 있는데 불행히도 매가 일찍 죽고 오직 누님과 군과 내가 70을 넘었다. 누님은 78세로 적화(赤禍)에 해를 당한지라 이미 팔년이 되었고 군은 75세로 독창에 걸리어 일어나지 못한지가 또한 삼년이 되었다.
내가 지금 79세로 폐질로 헐떡거리고 기거와 변선(便旋)을 일체 사람을 기다리니
곧 죽을 것 같은데 아직도 죽지 않으니, 심하다 내 생의 지리함이여. 이것이 내가 조석으로 빨리 죽기를 비는 것이다. 돌아가 우리 부모를 천대(泉臺)에 모시어 한 누님과 세 누이와 함께 슬하에 있어 환락을 드리면 그 행복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저 조화아(造化兒)가 일부러 장난을 하여 아직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해주지 않으니 이것이 원망스럽다.
슬프다. 군은 타고난 바탕이 완순하고 정숙하여 영리하고 민첩한 것이 등윤(等倫)에 뛰어 났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도와 우애를 지극히 하고 물건을 어거함에는 널리 어질고 사랑하였으며 몸가짐은 한결같이 규범으로 하고 일에 임하면 반듯이 법도로 하였다. 그러므로 부모가 깊이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네가 남자가 되었더라면 비록 나라라도 균평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군이 이군(李君)에게 출가한 뒤에 이군이 어질기는 하여도 수명이 없었다.
군이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대었으나 마침내 구제하지 못하였다.
군의 나이 그때 24세인데 일점의 혈육도 없었다. 맹세코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가인(家人)들이 엄하게 지키어 뜻을 이루지 못하매 복제를 가지기를 법대로 하여 혹시라도 남을 놀라게 하는 곡을 하지 않고 항상 간장(肝腸)으로 울며 헝클어진 머리, 때 낀 얼굴로 친문 밖으로 한걸음도 나오지 않고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상이 끝난 뒤에도 오히려 문을 닫고 깊이 처하며 바깥사람을 한 번도 접하지 않아서 시집가지 않은 처녀와 같았다. 내가 때로 군의 집에 이르러 어머니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뜻을 말하고 한번 근친하여 울결한 회포를 펴기를 권하면, 군이 말하기를 “어머니께서 내 얼굴을 보시면 반듯이 더욱 마음이 상하실 것이니 근친하지 않는 것이 낫다” 하며 완곡히 굳이 사양하였다. 권 한지 몇 해 만에 비로소 한번 와서 근친하였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한 방에 거처하였다. 내가 손님이 가고 난 뒤 밤이 고요한 때에 반듯이 군의 처소에 들어가서 매양 소학, 내측등 아름다운 말 착한행실을 고하면 군이 항상 즐겨듣고 찬탄하였다.
어느 날 밤은 어머니께서 군과 함께 예전 열녀가 코를 벤 일을 논하시기에 내가 양파(陽坡) 정 상공(鄭相公: (주)鄭太和)이 과부 딸을 시집보낸 일을 들어서 그 전말을 말하였더니 얘기가 끝나기 전에 군이 홀연히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형이 내 뜻을 빼앗으려고 시험하는 것인가. 비록 죽더라도 맹세코 형의 말에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다. 곧 죽는 남편의 집에 돌아가서 자진하겠으니 반듯이 이 밤에 가마를 차리어 나를 보내 달라. 그리하지 않으면 내가 걸어서 달아나고 형의 집에 일각도 지체하지 않겠다” 하며 밤새 노하여 부르짖었다. 부득이하여 날이 밝아지자 그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나도 또한 뒤를 따라가서 그 집에 이르러 하루를 지내고 돌아간다고 말하니 군이 오히려 분연히 말하기를 “빨리 가고 다시 오지 마오” 하였다. 그 뒤에 내가 군의 집에 이르면 군이 문득 말하기를 “ 형이 무얼 하려고 왔오. 지체하지 마오”하였다. 나는 머리를 숙여 절하며 위로하고 비유하여 사과하였으나 군은 귀를 가리고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 여러 편 편지를 하여 풀라고 일렀으나 군은 오히려 석연치 않았다. 칠팔년 뒤에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함을 말하였더니 군이 비로소 양아들 태환(泰桓)을 데리고 왔다. 어머니께서 군에게 이르기를 “ 내가 너를 부르는데 병으로 핑계한 것은 네를 반듯이 오게 하여 네 형과 화해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니 군이 드디어 기쁘게 내 손을 잡고 말하기를 “ 어머니의 명령이시니 감히 어찌 순종하지 않겠소. 내가 형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단연코 다른 것이 없음을 보인 것이오“ 하였다. 내가 이때에 눈물을 거두고 말하기를 ” 옛날 내가 정상공의 일을 끌어 말한 것은 실로 군을 잘못 안 것이며 군의 정백순열(貞白純烈)한 지조는 비록 예전의 코를 자른 이를 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찌 육단부형(육단부형)으로 군에게 절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하니 어머니께서 나에게 절하라고 하시었다. 군이 감히 못한다고 굳이 사양하여 하지 않고 드디어 즐거움을 펴고 파하였다. 이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미 40년전 꿈속의 일이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다시 알아서 전하겠는가.
슬프지 않을 수 있는가. 옛날 기미 광복의 역사에 나는 만국공회로 보내는 유림의 장서(파리장서)를 받들고 해외로 달아나는데 어머니의 연세는 이미 70이 지나고 세 아이는 강보에 싸이고 다박머리 소년이었다. 70이 넘은 어머니를 봉양할 다른 형제도 없었다. 군이 돌아와 우리집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봉양하니 어머니께서는 심히 편하게 여기셨다. 명년에 어머니께서 세상을 버리시고 나는 해외에 있어 돌아오지 않았는데 군이 태환을 데리고 염습 관곽의 제구를 몸소 다스려 이(易)와 척(戚)의 예를 다함에 지나침이 있을지언정 불급함이 없었다. 그때 원근의 친척이 와서 예를 돕는 자가 탄식하여 어질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분상도 못한 큰 불효한 사람인 나로서 비록 백번 죽어서 뼈가 가루가 된들 어떻게 이 은혜를 갚겠는가. 내가 대구 왜옥으로 잡혀오자 군이 손수 나의 먹을 것을 조리하여 하루에 반듯이 세 번씩 옥문을 두드리기를 1년 9개월이 지나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비록 원수 왜노(倭奴)의 교활 무례한 자라도 군의 지성을 장하게 여기어 예로서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가 대구에서 대전으로 이감되어 병이 위독할 때에 군이 미리 나의 죽은 뒤의 수의를 갖추어 날마다 옥문을 지키며 울부짖고 달리 넘도록 가지 않으니 옥리(獄吏)도 또한 감동하여 눈물을 자아내었다. 뒤에 나의 병이 급함으로 형이 정지되어 옥에서 나왔는데 얼마 안 되어 왜경의 박축(迫逐)으로 학성 바다위의 절(백양사)에 침복하고 있었다. 군이 때때로 와서 보고 의복과 음식을 보내는 것이 항상 길을 이었다. 내가 어머니의 묘하에서 추복을 할 때에 군도 와서 내 여막 옆에서 항상 함께 호흡하고 오래도록 가지 못하였으니 그를 항상 본 산 아래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일을 말하며 슬프게 여긴다. 이 두어가지가 모두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일호도 강작하여 한 것이 아니다.
팔일오 해방 이후에 내가 적도(赤徒)와 시배(時輩)에 용납되지 못하여 가금 화를 입은 일이 있었고, 6.25 뒤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더욱 크게 어지러워졌다. 저 무리들이 항상 나를 죽이어 마음에 쾌하게 하려 함에 군이 깊이 근심하여 매양 편지로 나에게 권하여 산과 숲의 도량을 넓히어 포용하라 하였다.
내가 처음부터 군의 말이 크게 이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나의 강계한 성품이 마침내 세상에 부앙하지 못하여 반민위유(反民僞儒)의 화가 지금까지 종식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내가 늙을수록 더욱 어리석어 군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허물이다. 내가 을미년(1955) 겨울 초에 영주 큰딸(인동 장씨) 집에서 병을 조리하고 있는데 홀연 군이 태환을 데리고 의원을 찾아 서울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창황이 서울로 와 군을 병상에서 만나니 군이 급히 내손을 잡고 말하기를 “ 내 병은 이미 할수 없게 되었오. 내가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은 다만 형을 한번 만나보고 영결하기 위함이오” 하고는 한숨을 쉬며 차마 놓지 못하였다. 목구멍 사이의 가는 말이 호흡을 겨우 지속하는데 그래도 죽기를 슬퍼하는 말이 없었다. 두어 날이 지나서 태환에게 명하여 돌아갈 행장을 차리기를 하니 나도 부득이 문에서 보내니 군이 한참을 목메었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 사람은 필경 한번 죽는 것이니 형은 슬퍼하지 마오” 하였다. 군이 돌아 간지 한 달이 넘어서 통부가 이르렀으니, 아! 슬프다. 내가 그때 급히 상가로 달려가서 휘장을 헤치고 통곡하니 군의 얼굴이 산 것 같고 조는 듯이 눈을 감았다. 내가 불러도 군이 대답하지 않고 내가 곡하여도 군이 말리지 않으니 죽은 자의 앎이 없음이 정녕 이러한가. 내가 어떻게 서로 의지하여 목숨을 삼는 동기를 잃는 것을 슬퍼하여 크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찌 내가 아직도 구차히 살아 있는 것을 슬퍼하며 더욱 크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군이 땅에 들어갈 때에 남편을 따라 함께 부장하였으니 군의 평소의 지극한 소원이 여기 있었으니 군은 반듯이 편안히 여길 것이다. 이것이 내가 군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나의 죽지 않은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내 병이 이미 고항(膏항)에 들어서 수년이래로 비위가 음식을 받지 않아서 천하의 진미라도 전혀 입에 맞는 것이 없고 혹 하루 이틀을 먹지 않아도 고프지 않으며 매양 옆 사람의 강권으로 한 술을 드나 또한 목구멍에 내려가지 않아서 때로 찬술 반잔쯤 마시고 그치니 이것이 내가 빨리 죽을 징후이다. 나와 군이 함께 구천에 모이어 즐겁게 지낼 것이 아침이 아니면 저녁인 것을. 아니 내가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하여 부(명부사자)가 이르기를 서서 기다리고 스스로 슬퍼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군의 영연(빈소)이 장차 걷히니 내가 군을 곡하는 것이 오늘 저녁을 놓고 다시 따이 없다. 그만이다. 그만이다. 어둡지 않은 것은 영혼이니 혹시 나의 곡하는 것을 곡하고 나의 슬픔을 슬퍼하려는지. 내가 무익한 슬픔으로 길을 가는 군의 영을 슬프게 하지 않으려하여 나의 곡도 여기서 그친다.
군은 내 술잔을 잘 받아서 한번 흠향하려는가.
아! 슬프다. 흠향하기 바란다
祭仲妹星山李氏婦文
歲丁酉十一月十四日庚辰, 我仲妹孺人李氏婦, 不于世之再朞也, 前夕己卯, 母兄躄翁 昌淑, 率孫男暐, 扶病匍匐, 來哭于靈几之前, 酹一觴而吿之曰, 嗚呼痛㦲, 君其死而吾其生耶, 死生大矣, 好生惡死, 人之常情, 吾今祈死而不死, 不暇悲君之死, 而乃悲吾之不死, 吾其反於常情者耶, , 不幸二妹俱早夭, 惟姊氏及君與吾, 同踰古稀, 姊氏, 以七十八齡, 遇害於赤禍, 已八年矣, 君, 以七十五齡, 不起於毒瘡, 亦已三年矣, 吾今七十九齡, 癈疾喘喘, 起居便旋, 一切須人, 若將俄忽屬纊, 而尙不化, 甚矣吾生之支離也, 此吾所以祈朝夕遄死, 歸侍吾父吾母於泉臺, 得與一姊三妹, 同處膝下, 而供歡樂, 其爲幸福當何如也, 彼造化兒, 故爲惡戱, 尙不許吾以幸福, 是可怨也, 嗚呼君生姿婉淑, 穎敏絕倫, 居庭而極其孝友, 御物而汎於仁愛, 持身而一以閨範, 臨事而必以繩尺, 是以父母甚鍾愛之, 甞曰使汝爲男子者, 雖邦國可均也, 及君之歸于李君也, 李君賢而無命, 君, 血其指而灌之竟不救, 君, 時年二十四, 無一塊遺血, 誓欲下從, 爲家人所嚴守, 不得遂其志, 則執制以軌, 未或爲駭人之哭, 而常泣以膓, 蓬首垢面, 不出寢門一步, 三年如一日焉, 喪畢猶閉門深處, 不接外人一面, 有若守貞之處子然, 吾時至君家, 致母氏願見之意, 勸一歸覲而叙欝結之懷, 君曰母氏, 如見吾貌, 必尤傷心, 不如不覲之爲愈也, 婉辭之固, 勸之有年, 始一來覲, 侍母氏同處一室, 吾於客散夜靜之時, 必入君所, 每引小學 內則等嘉言善行以吿之, 君常樂聞而嗟歎焉, , 必於今夜, 治轎送我也, 不者, 吾當徒步而走, 不欲滯兄家一刻也, 徹夜怒號, 不得已於天明, 送歸其家, 吾亦隨後而行至其家, 經一日吿歸, 則君猶忿然曰, 可速去而勿復來也, 是後吾至君家, 君輒曰, 兄來此何幹, 須勿滯也, 吾乃叩頭慰譬而謝之, 君, 掩耳而若無聞也, 吾母氏, 屢爲書而解之, 君猶不釋然焉, 後七八年, 以母氏病篤吿之, 君始率螟兒泰桓而來, 母氏謂君曰, 吾之招汝, 諉之以病者, 欲其使汝必來, 與汝兄解也, 君遂欣然執吾手曰, 母氏有命, 敢不承順, 吾非怨兄, 乃所以示吾志之斷斷無他也, 吾時收淚而曰, 昔者吾之引鄭相公事者, 實淺之爲知君也, 君貞白純烈之操, 雖古之截鼻者, 未或過之, 吾安得不肉袒負荆而拜君也, 母氏仍命吾拜之, 君固辭不敢而止之, 遂叙歡而罷, 回思此事, 已屬四十年前之夢境, 吾而不言, 誰復知之而傳之也, 能不悲哉, , 吾奉儒林長書致萬國公會者, 走海外, 親年已過七耋, 三兒俱在襁髫, 無他弟兄之可以奉篤老者, 君乃歸處吾家, 竭力忠養, 母氏甚安之, 明年, 母氏捐世, 吾時在海外而不還, 君率泰桓, 躬治附身附棺之具, 易戚盡其禮, 有或過之而無不及焉, 爾時, 遠邇親戚之來相禮者, 莫不歎息而賢之, 夫以吾不奔喪大不孝之人, 雖百死而粉骨乎, 而何以報此恩也, 及吾之被俘於大邱倭獄也, 君, 手調吾食, 日必三叩獄門而進之, 閱一年有七個月, 未或少懈, 雖以仇倭之狡無禮者, 莫不多君之至誠而禮敬之, 當吾之自大邱移囚於大田而病篤也, , , 後吾以病革, 停刑出獄, 未幾, 因倭警迫逐, 蟄處於鶴城海上之蕭寺也, 君時來視之, 衣服也, 食物也, 饋遺常相續於道路, 及吾守稅制於先妣墓下也, 君來處吾廬側, 常偕爲號泣, 久之不忍去, 山下人之常目者, 至今道其事而悲之, 之數者, 盖皆君孝友之出於天者, 非一毫勉強而爲之者也, 八一五以後, 吾爲赤徒與時輩之所不容, 種種有禍機之叵測者, 逮六二五之後, 天下尤大亂矣, 彼輩常欲殺吾而甘心焉, 君深憂之, 每爲書勸吾, 恢山藪之量而包容之, 吾未始不以君言, 爲大有理, 而吾之薑桂之性, 終不能俯仰於世, 至今尙不熄焉, 此吾之老而益愚, 不入君言之過也, 吾於乙未冬初, 調病於榮州張氏女家, 忽聞君率泰桓, 尋醫於漢師, 遂蒼黃入闉, 會君於病床, 君遽執吾手曰, 吾病已不可爲矣, 吾之留此, 只爲與兄一面而永訣, 因噓唏不忍舍, 喉間微語, 呼吸僅續, 而猶無怛化語, 居數日, 命泰桓促治歸裝, 吾亦不得已, 臨門送之, 君嗚咽良久, 徐曰人生, 會有一死, 兄不須浪悲也, 君歸踰月而訃至, 嗚呼痛哉, 吾時急赴喪次, 披帷而痛哭, 君之顏面如生, 而翕目如睡, 吾呼而君不之應, 吾哭而君不之止, 化者之無知有如是也耶, 吾安得不悲其失相依爲命之同氣, 而爲之大哭, 又安得不悲吾之尙苟生, 而尤爲之大哭也耶, 君之入地也, 就夫子同穴而祔之, 君之平素至願在此, 君必安之矣, 此吾所以不悲君之死, 而悲吾之不死也, 吾病已入膏肓, 數年以來, 胃不受食, 天下珍味, 全無可於吾口者, 或一二日不食猶不飢, 每爲傍人所強而進一匕, 亦不下咽, 時吸冷酒一半斝而止, 此是吾遄化之候, 固知吾與君, 同會於九泉而做歡樂者, 匪朝伊夕, 吾方以是自慰, 立竢符到, 而不欲自悲者也, 君之靈筵將撤, 吾之哭君, 舍今夕而更無其地, 已矣已矣, 不昧者靈, 亦或哭吾之哭而悲吾之悲耶, 吾不欲以無益之悲, 慽君長逝者之靈, 吾之哭亦止於此矣, 君其好收吾觴, 而爲之一歆也 耶, 嗚呼痛哉, 尙其饗之。
작금의 가치관과는 조금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