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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재산을 되찾기 위한 범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2007년 현판식 모습. .....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하판락은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2월 처음 순사로 일제 경찰이 되었다. 그런 하판락이 사천경찰서를 거쳐 38년 부산 수상경찰서의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고등 경찰로서 '고문 귀신'이라는 악명을 떨쳤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시대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인 것이다.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고문귀'가 그의 별명이었겠는가. ...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 였다.... 1943년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한 고문이 그것이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거듭 부인하는 그의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인이 끝내 절명한 것이다. 또한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못했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으로 모두가 신체 불구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착혈 고문귀 하판락'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친일 재산조사위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이 잔악한 친일파의 만행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하판락이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지난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된 하판락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 선생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했다. 그리곤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이었고 결국 이같은 고문 끝에 여경수 등 독립투사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설령 살아남은 이들은 신체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를 만나면 직이뿌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해방후 하판락,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이 잘 먹고 잘 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본 놈들 아래에 있었던 거잖아요. 순사도 경찰서장은 일본 놈이었고 관리도 높은 직책은 일본 놈들이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 45년에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나니 그 후에는 그나마 자기들 위에서 지배하던 일본 놈들도 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친일파들이 차지 했잖아요. 경찰서장이고 장관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해방된 자들은 바로 친일파 아닙니까"라는 것이었다. 하판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 해방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다.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 1년의 일이었다. 하판락이 부산에서 반민특위에게 체포된 것이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 로 압송하려 하자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 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부산시민들이 애원할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반민특위에 의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끝내 자신이 한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 발생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하판락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일제 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을 가지고 사업가로 변신,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았고 2003년 9월까지 향년 92세의 천수까지 누리며 살다가 떠났다. 친일파로서 가장 끝까지 살다가 떠난 이가 하판락이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명단에 든 대상자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친일파가 바로 하판락이었던 것이다.
'친일 고문 경찰 하판락' 잊지 말아야 용서해야 할 것과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민족은 결코 번성할 수 없다. 94주년 '3. 1 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아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내려놓은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을 생각한다. 그들이 친일 고문경찰 하판락으로부터 그 지독한 고문을 당하며 죽어갈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내가 너에게 이렇게 당하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그날에는 친일파인 네가 반드시 이렇게 당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네가 한 이 짓을 만인이 알아 네가 편히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까지 제대로된 친일파 청산도 이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민초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늘 나는 그의 이름을 나무판에 새기듯 고발한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하판락' 그가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에게 가한 '고문 만행'은 역사적 심판을 위해 남기고자 한다. 또한 하판락의 고문으로 숨져간 여경수, 이미경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외 신체 불구가 되어 참담한 생활고 끝에 생을 다한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에게 후손으로서 위로하고 사죄드린다. 끝으로 94주년 3. 1 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아 마음을 다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94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