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번에 걸쳐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적었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그 글에 영감을 좀 얻어서...
왜 당시의 이승만이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가면서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나를 추적해보는 글이 될거 같네요.
이승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확고하게 잡았던 기치가 있었습니다.
테러도 없고, 전쟁도 없고 오로지 이성과 신앙(그는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1914년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승만은 당시 신문 기고문을 통해서"나는 반일적 내용을 가르치지 않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려 한다."라고 주장한적이 있으며 나아가 박용만 선생이 만들었던 국민회를 흡수해서 자신의 어용단체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장투쟁을 주장한 박용만 선생을 테러꾼으로 몰기도 하죠. 이 시기에 스티븐슨 암살사건의 변호인을 맏지 않은건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웃기는건 테러와 전쟁을 배제하고 이성과 신앙등을 통해 독립을 원한다는 이승만이 이 과정에서 암살시도, 재산 매입, 편법적인 재산양도, 재산 사유화 등 불법적인 과정들을 동원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이승만은 자신의 기반이 되어왔던 감리교 교단과도 선을 그으면서 한인 기독교회를 만들고, 나아가서 많은 재력과 사회적인 인망을 무기로 삼아 한인사회를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한때 같이 일하던 박용만 선생은 이당시 송사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증인으로 나서서 박용만 선생을 비난한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였습니다. -ㅁ-.....(이후 박용만 선생이 알력관계로 암살을 당하자 "그는 스파이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옹호한 것도 이승만 대통령..... 이건 뭐......)
이승만 대통령은 1918년 당시 파리에서 개최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서재필 선생은 미국인 신분인지라 파견을 가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죠. 여기서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당시 같이 있던 몇명을 데리고 파리로 넘어가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고 했는데 "여권"이 없었습니다........ 세계를 떠돌면서 "평화로운 해방"을 설파하려는 타고난 정치가인 그에게 여권 발급이 안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청천 벽력과도 같은 일이였던거죠. 당시 여권 발급이 안된 이유는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발급 받으라는 지극히 행정적인 이유 때문이였습니다.
아마 이때쯤이 이승만이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하던 시점일 겁니다. 이승만은 명성을 얻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면서 평화주의자로서, 그리고 기독사회의 대표로서 독립을 표방하는 "깨어있는 지식인"이 되고 싶었을겁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른 전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평화주의 사회 운동가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계기......
발이 묶인 이승만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외교력과 이성을 이용한 아름다운 독립을 하고 싶은데 세상은 자기편을 안들어주는 거죠. 여기에 급했던 이승만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것이지요. 이에 이승만은 갑자기 태세전환을 합니다. 독립운동가가 된 것이지요.
그는 당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과 손을 잡고 다수의 독립선언문에 사인을 하고, 나아가서 당시 일제치하의 조선에 밀정을 보내서 민족자결주의를 안내하면서 거사하라고 바람을 넣었습니다. 결국 일련의 국제분위기와 노력들은 3.1 운동으로 나타났고,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일을 빌미로 일본의 레이더망에 오르게 되고, 암살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실제로 한번 피습도 당합니다.)
그럼 평화를 표방하던 이승만이 왜 갑자기 민족자결주의를 들먹이면서 반일본 노선으로 갔을까요? 그것도 일본의 레이더망에 정면으로 걸릴 짓을 하면서?? 그건 이후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승만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미국의 좀 알려진 이민자 집단의 리더에서 벗어나 이승만은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당장 서재필 선생이 주최하는 미국 내 한인 자유대회 및 한인 연합회의에 "대표" 및 "기조연설자" 자격으로 참관하게 되었으며, 1919년 이후 해외의 자그만치 5~8개 독립운동 단체들에게 감투를 받아쓰는 유명인이 됩니다.
이때 받은 감투들을 보면, 국방장관, 국무총리, 집정관 총재, 외무장관 등등 엄청났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등에 업고 이승만은 일순간에 "스타"로 떠오르게 된 거죠. 일제의 견제를 받는 독립운동가가 된 부담이 있지만, 대신에 명성을 손에 넣었고,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의 기반도 만든셈입니다. 이승만이 당시에 워싱턴에 집무실을 만들어서 대통령처럼 굴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나아가 일본에서는 사방팔방에서 모시고 싶어서 안달난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잡기 위해 현상금까지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상금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기가 높아지는 바로메터가 바로 현상금이니....(뭔 원피스 시대의 초신성도 아니고...)
이때 당시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맘대로 내걸었는데, 그 어떤 독립운동 단체도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없다는 안창호 선생님의 지적에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라는 대꾸를 하는 패기를 보여줍니다.
더 기가 막히는건, 이승만의 이러한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승만의 "명망"이 급했고, 국제사회의 협력이 절실해서 결국 이승만을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승만은 미국에서만 뻐팅겼습니다. 그러다가 고작 1년도 안되어서 다시 하와이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시선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이승만의 명성 역시 사그라들었습니다. 또한 1925년 임시정부는 면직이라는 형식으로 이승만을 떨궈냅니다.
그러나 지지리도 운이 좋은 이승만에게 다시 희망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당시 임정은 일본의 탄압으로 자금부족에 시달렸고, 결국 김구선생은 이승만에게 손을 벌립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없는 사정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돈을 주면서 임정과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간교한 관계였냐 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1930년 이후 임시정부의 무장투쟁 노선들을 모두 비난 했습니다. 윤봉길 선생의 의거도, 이봉창 선생도.....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임정에 돈을 송금해주었죠.
이렇게 이중적인 행적을 하다가 임정은 결국 이승만을 다시 받아줍니다. 그리고 이승만에게 내린 직책이....."외교 전권대사!"
네. 맞습니다. 드디어 이승만은 자신의 꿈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설파하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게 되었고, 유명인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 러시아를 돌면서 이승만은 엄청나게 자신을 선전했고, 이 과정에서 반려자인 프렌체스카 도너를 만나게 되는 행운도 얻습니다. 이로서 그는 전세계에 알려진 한국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당시 서류들을 보면 이승만의 국적은 "KOREA"로 나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일본과 다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승만은 1941년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씁니다. 그런데 이게 또 진주만 습격과 맞물려서 히트를 칩니다. (역시 운빨 하나는 최강이네요....)
이제 거리낄 것이 없는 이승만은 마지막 작업에 돌입합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몇번의 충돌로 인해서 많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축출되어 있었고, 이승만은 그만의 정치감각으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빠르게 조선을 점령할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됩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얼굴마담인 그는 미국에 끈질기게 "상해 임시정부"의 정식 정부 승인을 요청합니다.
여기까지가 해방 전 까지 이승만의 행보입니다.
결국 이승만이 일본을 국적으로 적은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이승만은 원래 독립운동가가 아니였기 때문이죠.
지식인 컨셉으로 오로지 정치적인 과실만을 원하던 정치인이였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