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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 장군-남한과 북한의 국립묘지에 동시에 안장된 軍神
게시물ID : history_223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ckk
추천 : 12
조회수 : 1837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5/08/04 06: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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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목숨걸고 치열하게 일제에게 투쟁해 남북한 국립묘지에 안장되어계신 양세봉장군님..

이런분을 고작 3등급으로 인정하는 대한민국...

나중에 누란의위기때 국민들에게 뭐라고 할건지..ㅡ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40609104802422

日本軍 함정에 빠진 양세봉 장군의 최후

[임기상의 역사산책 40]남북한 모두 떠받드는 남만주의 軍神 '양세봉 장군'노컷뉴스 | 입력 2014.06.09. 10:48

↑ 남만주의 신빈현 왕청문에 세워진 항일명장 양세봉 장군의 조각상.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중국에서 조선인의 석상은 이례적이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 양 장군이 남긴 유일한 사진.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다.

.....

양세봉은 1924년 남만주로 넘어와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한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5월 16일 국경을 넘어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여 여러 명을 사살하고, 사흘 후 사이토 총독에게 총알을 날려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신출귀몰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양세봉은 독립군 안에서 최고의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 만주의 유일당 조선혁명당 결성되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하다

흩어져 있던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은 1929년 12월 만주의 유일한 정당인 조선혁명당을 결성했다.

양세봉은 그 산하의 무력부대인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중국인 부대인 요녕농민자위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200여 차례 교전을 벌였다.



↑ 조선혁명군의 근거지였던 신빈현 영릉가 앞산인 연두산. 대원들은 낮에는 이 산에 숨어 있다가 야간에는 내려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연구재단 조사 결과,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1929년~1934년까지 5년간 벌인 전투는 80여 차례, 사살한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은 1,000명에 달했다.

양세봉 장군 밑에서 참모장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이가 나중에 광복군 지대장이 되는 김학규 장군이다.



↑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의 후예인 광복군. 김구 주석(첫줄 왼쪽에서 8번째)의 왼쪽이 지청천, 그 왼쪽이 김학규 장군이다. (사진=사진작가 권태균 제공)

김학규 장군은 양세봉 장군 순국 후에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해 무장세력인 광복군을 창설한다......


↑ 공장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김일성 주석. 양세봉 장군을 존경했던 그는 양 장군 사후 그의 유가족들을 끝까지 도와주었다. (사진=만경대 혁명사적관 제공)

↑ 1933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보도. 만주에서 활약하는 양세봉 장군의 동정은 조선 민중의 희망이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렇게 양 장군 밑에 좌와 우를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데는 그의 인품도 작용했다.

양세봉 장군 휘하에서 소대장으로 싸웠던 계기화(2002년 82세로 작고)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부하에게 욕하는 일이 없었으며, 부하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싸구려 엽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

◈ 일본군의 함정에 빠져 순국...남한과 북한의 국립묘지에 동시에 안장되다

양세봉 부대에게 번번이 깨지던 일본군은 그를 제거하려고 막대한 현상금도 걸고, 밀정들을 총동원해 작전을 벌였다....

....


....

1934년 8월 신빈현 왕청문에 있는 사령부를 나와 언덕을 올라가다 옥수수밭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순국했다.

후에 부하들이 비밀리에 산 중턱에다 시신을 묻었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군은 목을 잘라 통화현 시내에 내걸었다.

해방 후 북한 정부는 양세봉 장군의 무덤을 평양 근교로 이장했다가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다시 안치했다.




↑ 양세봉 장군의 묘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과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북한은 양 장군의 부인 임재순과 외아들 양의준을 평양으로 초청해 극진하게 예우했다.

남한에서도 1974년 동작동 국립묘지에 양 장군의 묘지를 조성했다.

유골은 모시지 못한 허묘이다.

국내에 유족이 없어 다른 묘비와는 달리 '공훈판'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게 특징이다.

양세봉 장군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모두 릉을 조성한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양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독립운동 단체들과 역사학계는 반발했다.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을 들고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는 3등훈장(독립장)을 수여하다니..."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0616103706728

中서 항일名將 양세봉 장군 전기 출간

연합뉴스 | 신민재 | 입력 2012.06.16. 10:37
일제 침략에 맞서 중국 남만주(南滿州·현재의 지린·랴오닝 일대) 일대에서 항일 무장운동을 펼쳤던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1896~1934) 장군의 전기가 중국에서 출간됐다.

16일 조선족 매체인 랴오닝 조선문보에 따르면 길경갑 선양(瀋陽) 조선족연의회 회장의 후원으로, 조선족 재야 역사학자 전정혁 씨와 랴오닝성 신빈(新賓)현 당안관리국 전 부국장 조문기 씨가 공동 집필한 '양세봉장군전'이 출간됐다.

이 책은 양 장군의 생애와 항일투쟁사를 수십장의 사진과 함께 11개 부분으로 나눠 소개했다.

책의 공동저자인 전정혁 씨는 "양 장군은 세상이 공인하는 항일명장이고, 민족영웅이지만 국적이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열사추진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항일용사들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평가, 정착을 위해 사회 각계에서 힘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1896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양 장군은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자 1919년 23살의 어린 나이에 최시흥(崔時興)이 이끄는 천마산대(天摩山隊)에 입대, 항일무장 운동을 펼치다 이듬해 중국으로 건너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소대장 등을 거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조선혁명군은 당시 중국 남만주와 동변도(東邊道) 일대에서 활약한 3대 항일 무장세력이었던 참의부와 정의부, 신민부를 통합한 조선인 최대 규모의 항일 무장세력이었다.

이들은 신빈현을 근거지 삼아 융링제성(永陵街城)과 싱징현성(興京縣城)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이름을 떨쳤다....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4060910480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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