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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보트피플의 진실은 무엇인가?
게시물ID : history_223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화이트피그
추천 : 1/9
조회수 : 2801회
댓글수 : 24개
등록시간 : 2015/08/03 18:59:27

1975년 미군철수와 함께 망해버린 패망월남을

한국의 수구꼴통들은 소위 "자유월남"이라고 표현하며

그들 "보트 피플"들이란 공산당에 의해 적화통일된 베트남에서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로 묘사되어 왔지요.


그래서 아직도 많은 한국국민들은 패망월남의 "보트 피플"이란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론직필도 진실을 알기 전에는 그와 같은

거짓말 반공교육에 속아...실제로 그것이 진실인 줄 착각하며

살아왔지요.


그래서 여전히 한국국민들 대부분은 아직도 보트 피플의 진짜 진실에 대해

모르고 아래 게시글 내용과 같이 철저히 세뇌된 내용이 진실인 줄 착각하고

있지요.



보트 피플이어떤 사람들이죠?


http://ask.nate.com/qna/view.html?n=8960014



그렇다면.....이제 우리는 패망월남의 보트 피플이란 도대체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었는지...그 진실에 대한 여행을

한번 떠나보기로 하지요.


물론, 대부분....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편견, 진실왜곡적인 내용들이 많아보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대충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트남 공화국


1 개요

2 역사

3 남베트남 부패의 역사

4 베트남 전쟁

5 멸망

6 숙청

7 왜 망했는가

8 남베트남의 해외 후예들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oa, 비엣남 꽁 호아, 越南共和). 


북베트남이라 불리던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대립하며 

현 베트남의 남부에 존속하던 국가. 

간단하게 남베트남(Nam Việt Nam)이라고도 불린다.


이 쿠데타는 사실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총 42,000달러나 되는 뇌물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저런 망언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조차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CIA가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독단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해도 묵인한 걸지도 모르고, 어쩌면 쿠데타 지원 자체를 정부 측에서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지엠이 암살당하자 이번에는 장군들 간에 권력다툼이 시작되어 쿠데타가 줄을 짓다가 

1965년에 응우옌반티에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소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막장을 다시 시작하였다. 

자기 힘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진지한 태도를 갖지 않고 

미군의 전투력과 쇼미더머니 신공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독자적인 전쟁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재정적자, 무역적자, 인플레이션의 3박자가 겹치면서 

경제도 점차 안습이 되고 농촌지역의 상당수가 베트콩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정치적 혼란과 여러 이유로 병역기피가 만연하였으며 

이 때문에 군대는 자주 농촌 마을들을 수색하여 징병을 해야했다고 한다.


결국 1973년 1월에 파리 협정을 체결한 미국이 전쟁에서 손 털고 떠나버리자 

베트남 공화국은 완전히 새 되고 말았다. 


1975년 봄에 시작된 북베트남의 막판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은 쑤안록에서 치열하게 싸운 18사단 같은 일부 부대의 영웅적인 항전을 제외하면 일패도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엄청난 군사지원을 해줘서 일시적으로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도 패퇴하고 만 것이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이 준 장비만으로도 공군력 세계4위, 총 병력수 1백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이란 건 잘 알고보면 빈 껍데기였다. 겉은 번드르르 했지만 안은 엉망이었다. 


미국이 준 무기의 규모는 정말 세계 순위권에 들 수준이었으나, 정작 그 순위권에 드는 규모의 무기를 굴릴 돈과 물자는 주지 않았던 것이다. 뭐 미국도 일부러 안 준게 아니라 베트남 전쟁의 수렁 때문에 경제난이 심각해서 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이런 상황이다보니 최종공세 당시 남베트남군은 연료와 부품이 없어 비행기도 제대로 띄우지 못 했고탄약의 부족으로 전투에도 제한을 받았다. 탄약 아껴쓰라고 명령이 내려올 지경이었다. 전술적으로도 미국식 전술과 미군의 지원에 너무 의지하게 된 것이 약점이 됐다. 미군만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군대가 미군처럼 싸우는데 익숙해져버렸으니.


게다가 남베트남은 게릴라를 잡으려고 전군을 국토에 넓게 분산시키는 잘못을 저질렀고, 부족한 병력을 무리하게 넓게 펼치다보니 전국토의 치안 유지 능력이 악화되었다. 


결국 전략을 수정하여 주요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다음 토벌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를 감행하였으나, 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이 부대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빈틈을 노려 침공해왔다. 방어체계를 제대로 굳히기도 전에 전격전을 당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부패하고 친서방주의의 베트남 공화국에 이미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로 인해 개전 초기에 1백만이 넘는 병력 중 반 이상이 탈영을 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생전에 베트남 공화국을 정복하는 데 3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죽은지 몇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개전 1달 만에 정권이 무너졌다. 이후 남베트남에는 북베트남의 괴뢰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Cộng hoa Miền Nam Việt Nam)'이 세워져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과 통합하여,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다.


6 숙청


같은 해 같은 달에 들어선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서 악질 공산주의자들이 설쳐서 진짜 200만명이 처형되거나 굶어죽은것과 달리. 베트남의 경우 사정은 좀 낫다. 1975년부터 10년간 사법적 과정 없이 처형된 자들은 65,000명 정도며, 많이 잡으면 10만명 정도이니까.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은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80년대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그다지 부패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을 허가해주기도 했다.


또 이런 반공단체 소스에서 나온 이야기로,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내 좌파, 베트콩까지 숙청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남베트남이 전복이후 잠시 존재했던 남베트남 공화국 각료들은 대부분 별탈 없이 잘 살았다.


이렇게 수치는 과장되었지만, 어쨌든 상당히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약10만), 수용소(약 100만)로 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캄보디아나 북한 정도는 아니지만 비난받아도 할 말은 없다. 호찌민은 통일후 대량숙청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는지 베트남전 종전 몇년 전에 죽을 때 남베트남 사람을 탄압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은 것 같다.


7 왜 망했는가 


당시 남베트남은 그 정체성 자체가 애초에 프랑스와 미국의 정치적 필요로 인해서 급조된 속빈 강정이었고, 당연히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국민 전반의 공감과 지지 또한 없었다. 한마디로 이 당시 남베트남 국민 대부분이 보기에 남베트남 정부는 그저 이름만 있는 기구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응오딘지엠이 초기처럼 제대로 통치했으면 그래도 나라의 기틀을 잡았겠지만,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데다가, 거기다 베트남인들이 대다수 믿는 불교를 탄압한지라 사실상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었다. 


https://mirror.enha.kr/wiki/%EB%B2%A0%ED%8A%B8%EB%82%A8%20%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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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보트피플]베트남 「보트피플」사례

기사입력 1997-05-13 08:04:00 기사수정 2009-09-26 21:31:32


지난 75년 월남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베트남 난민의 대탈출은 80년대 후반까지 10년 이상 계속됐다. 유엔고등판무관실 등이 파악한 난민의 수는 4백만∼5백만명. 이중 1백50만명이 조그만 목선 등에 생명을 맡기고 정처없이 망망대해로 나선 보트피플이다. 


이들은 새로 들어선 정부의 학살을 피해 어선이나 소형 돛단배 심지어 고무보트까지 이용,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했다. 베트남 당국의 추적을 피해 무조건 넓은 바다로 떠난 난민들은 폭풍우를 만나거나 워낙 작은 배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승선한 탓에 배가 침몰, 몰사하는 등 자유를 찾으려던 여정을 비극으로 끝맺기도 했다. 


어려운 항해끝에 인접국에 도착한 보트피플은 초기에는 「정치적 난민」으로 취급돼 미얀마 라오스 태국은 물론 멀리 떨어진 홍콩 싱가포르 한국 중국 등에 정착하거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으로 건너가는 등 비교적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지나가던 화물선들도 이들을 구조, 자유를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탈출이 계속되면서 이들의 정착이 사회문제화되고 자국 노동자들과의 갈등관계까지 나타나자태국 필리핀 등 보트피플이 집중적으로 몰려들던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은 해상을 봉쇄, 난민의 입국을 막기에 이르렀다


보트피플을 선선히 받아줄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 공공연해지자 화물선 등 큰 선박들도 구조를 외면하게 됐다. 


심지어 난민들이 지닌 금품을 약탈하는 「해적」까지 생겼다

초기에 베트남을 떠난 난민의 상당수가 월남의 기득권 계층과 부유층이서 

상당한 돈과 보석 등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89년4월에는 남중국해를 떠돌던 어린이 20명 등 베트남 난민 1백30명이 

태국 어부들에 의해 학살당해 「바다의 아우슈비츠」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처음에 난민을 받아들였던 나라들도 80년대 후반부터는 난민들의 자국 귀환을 종용하는가 하면 

강제송환에 나섰다. 당시 베트남을 탈출한 사람들은 공산화된 베트남의 「평등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베트남의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뛰쳐나온 경제적 난민이거나 자발적 또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몰려난 실업자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트피플의 탈출러시속에 우리나라도 77년5월부터 30여 차례에 걸쳐 난민의 입국을 허용, 1천3백여명을 부산 난민수용소에서 보호해 왔으나 이들을 조금씩 제삼국 또는 베트남으로 보내 지난 93년2월 마지막으로 1백50명이 뉴질랜드로 떠나 수용소의 문을 닫았다. 〈구자용기자〉


http://news.donga.com/3/all/19970513/7253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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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패망의 날


                        배에 승선하려는 탈출자들의 행렬



                          미군 헬기에 탑승하려는 탈출 행렬



                    주월 미국 대사관에 난입하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미군



                  월남 패망의 날 - 탈출을 대기하던 사이공 시민들


위 사진들을 살펴보면....이상하게도 가장 안전하게

탈출하는 월남인들은 모두 미군들에 의해 탈출되고 있다는 점이지요.


즉, 그들이 바로 진짜 부패 매국노 세력이었던 패망 월남의

기득권층들 가족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월남 서민들은 베트콩 및 월맹의 사이공 진격에

어떤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요?



 월남 패망의 날 - 사이공으로 진군하는 베트콩과 월맹군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월남 패망의 날 - 사이공으로 진군하는 베트콩과 월맹군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적화된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숫자는 말레이시아 16만 5000명, 태국 6만 5000명, 필리핀 2만 6600명, 싱가포르 6만 5000명 등이며, 1980년까지 서방 각국이  받아들인 난민 수는 미국의 31만 명을 비롯하여 캐나다 7만 명, 프랑스 7만 명, 오스트레일리아 4만 3000명 등에 이르렀습니다.



                        사이공거리로 입성하는 공산군들은 승리의 기쁨에도 

                      엄격한 군기를 유지하고 일탈적인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론직필 주:

대개 전쟁에 승리한 군대들은 강간이나 약탕을 일삼는다고

하는 것이 전쟁상식이겠지만.....

그러나 호지명 공산당 군대는...그런 부도덕한 짓을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http://bestan.tistory.com/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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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의 롤모델, 스리라차 소스 이야기


오랜 세월 전쟁에 휩쓸려 국토가 피폐해지고 많은 희생자를 낸 베트남에서 1975년 총성이 멎습니다. 

미국이 개입하여 수십년 함께 싸워온 월남정권이 패망한 것입니다. 부패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정권은 아무리 물적, 인적으로 지원을 하여도 전쟁에서 이길수 없다는 좋은 본보기를 보이며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거지요. 그리고 명분없는 전쟁을 계속 끌어온 미국 역시 스스로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며 심각한 상흔을 안은채 베트남에서 불명예 철수를 합니다.


베트남 통일정권은 전쟁때 남쪽 정부에서 일하던 공무원, 군인, 외국군대에 조력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남쪽편에 서서 북쪽을 적대시했던 사람들을 투옥하거나 재교육 캠프에 집어넣습니다. 


백만명에서 이백만명 사이로 추정되는 이들 가운데 운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유럽, 호주, 캐나다 등 받아주는 곳이면 어디든 갔는데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 미국입니다. 여권없이 한 밤중에 쪽배에 몸을 싣고 나오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어도 통계에 잡힐 방법이 없으니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고 아직도 추정만 무성한데, 풍랑, 질병, 기아 그리고 이들의 재산을 노린 해적등에 의해 희생된 보트피플의 숫자는 적어도 20만명에서 40만명이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일, 이백만 가운데 70퍼센트가 희생되었다는 추정치도 있습니다.


http://babnsool.egloos.com/304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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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이대용 날 짜   2005년 9월 1일 목요일 


    1975년의 월남과 2005년의 한국 

    1975년 베트남과 지금의 남한 


이대용 (前  駐越공사) 


"대통령, 학자, 지식인들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독일의 통일을 말하지 말라. 

지금 우리는 월남과 똑같은 방법으로 패망하고 있다."


109만여명의 난민이 나라없는 민족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보트를 타고 도망쳤다

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가 난무했다.


1973년, 드디어 월맹이 제안한 "평화협정"에 속아넘어갔다

그리고 철수했다. 미군이 나가자 1975년 4월, 월남이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사치품들이 있던 자리에 피와 파편이 즐비했다. 

총 끝 앞에서 목숨을 구하는 자들의 아우성이 타이타닉호의 최후처럼 처절했다.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국민이 당하는 최후였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5년간을 끌어오던 베트남전이 종식되었다.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종이조각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문서였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었다. 캐나다,이란, 헝가리, 폴란드 등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다. 월맹의 외무차관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절로 받아 놓았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다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다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디다. 이처럼 철저한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할 대로 상실해 있었다. 매년 80만 ~ 100만톤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에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에 망하고부정부패에 망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월맹경제 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1975년 9월에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 혼란과 어우러졌다.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계층간 갈등이 증폭되었다.


티우 대통령은 강력한 방공주의자였지만 부패했다. 그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지만 이름만 군적에 두고 외국 유학을 떠났다. 그러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부정축재가 판을 치고, 황금 만능주의,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 있다. 

월맹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끼 식사를 했으며 속옷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발에다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월남군을 붕괴시킨 것이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무기를 고철로 만든 것이다


http://unitypress.com/free_board/78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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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접수한 후 월맹군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월맹은 제일 먼저 월남에서 반공인사와 남베트남의 고위층과 유산가들을 숙청하였다.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또한 비슷한 경로로 공산화되었다. 
이를 두고 도미노 이론이라고 한다.

한편 통일 이후 정치적 변화와 경제난이 겹쳐 많은 수의 보트피플이 생겨났다. 이들중에는 통일 후 베트남 민족주의의 고양에 따라 재산을 몰수당한 중국계 화교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이들은 통일 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베트남을 탈출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많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 이유가 더 컸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통일 후에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캄보디아와 거듭된 전쟁으로 국방비부담이 증가한데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경제의 재건은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이들을 정치적인 박해자라기보다는 경제적 난민으로 보아 외면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냉전이 완화되고 개혁개방으로 베트남의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보트를 이용한 해외 망명자는 없어졌다. 종전 후의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15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이 중에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이라고 여겨진다.

http://ko.mythology.wikia.com/wiki/%EB%B2%A0%ED%8A%B8%EB%82%A8_%EC%A0%84%EC%9F%81



위 내용들이....패망 월남의 "보트 피플"들의 진실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제공해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위 문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요.


즉, 그들은 결코 "자유"를 찾아 도망간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공산화된 베트남 당국에 의해 처형될 것이 두려워

도망간 월남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당시 남베트남 인구는 아마도 적어도 2천만명은 되었을 것인데....

그 중 고작해서 몇십만명 정도가 도망간 것이지요.


그리고 참고로....


"보트 피플"들은 당시 어느 나라에서도 흔쾌히 도움을 주고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


도대체 어느 나라가 매국노들에 불과한 그들에게

흔쾌히 도움을 주고 싶었겠습니까?


그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한 자들이니....

미국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했겠지요.



적화된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숫자는 말레이시아 16만 5000명, 태국 6만 5000명, 필리핀 2만 6600명, 싱가포르 6만 5000명 등이며, 1980년까지 서방 각국이  받아들인 난민 수는 미국의 31만 명을 비롯하여 캐나다 7만 명, 프랑스 7만 명, 오스트레일리아 4만 3000명 등에 이르렀습니다.



위 숫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동안 미국이 남베트남을 식민지배하면서 길러둔

미국 끄나풀 노릇을 한 남베트남 세력들의 숫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물론, 위 숫자에는 그 가족들이 포함된 숫자이니까...

미국에 그동안 빌붙어 매국질을 한 남베트남 사람들 숫자는

사실 위 숫자 보다 훨씬 더 적은 숫자이겠지요.


그러나 티우의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부역질을 한 당사자만

도망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자기 가족들까지 모두 이끌고 도망가야만

했으니......그 숫자가 위와 같이 불어난 것이겠지요.



(뱀발) 패망한 티우 정권의 "자유월남"과 "자유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거짓 내용으로 유신독재 시절의 반공교육 내용이나

세뇌하기를 좋아하는 수구꼴통 세력들은....그러고보니

"자유"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하는가 보군요.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위 본문글을 써놓고 보니

그들 수구꼴통들은 패망한 티우 월남에 대해서도

"자유"라는 단어를 붙여서 "자유월남"이라고 불렀고

보트피플 대부분이 "자유월남"의 기득권층들이자

미국에 빌붙어 충성하며 매국질을 했던 세력들로서

적화통일된 북베트남이나 공산게릴라 세력인 베트콩들에게

매국질이 들통나 처단당할 것이 두려워 무작정 바다로 도망간 것을 두고

무슨 공산당 정권 하에서는 자유가 없으니, "자유"를 찾아

보트를 타고 도망간 것이라고.....그동안 대국민 사기질 교육을

해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호지명 공산당 세력에 의해 "적화통일"된 베트남을

탈출하지 않고 조용히 머물러 있었던 베트남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당시 티우 월남에는 아마 적어도 몇천만명의 남베트남 인구가

살았을 것인데....그들 대부분은 도리어 사이공에 진입하는

호지명 공산당군대를 환영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러고보니.....그들 수구꼴통들은 한국에 대해서도

걸핏하면 "자유대한민국" 운운하면서, 그것이 마치

북한 공산당정권 보다 우월한 이유이기라도 한듯이

떠들어대곤 하지요.


그래서 그들 수구꼴통들이 말하는 소위 "좌파세력" 또는

"종북세력" 또는 "진보세력"들은 바로 그 단어를 부정하는듯이

몰아가며 마녀사냥을 하곤 하지요. 


그건 인터넷 게시판 댓글들만 살펴보아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암튼, 현재의 한나라당 정권 하의 "대한민국"이

과연 정말로 "자유"가 많은 "자유대한민국"이 맞기는 한 것인지

정론직필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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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필론 카페펌..

이것도 유사역사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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