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조선의용대등등의 역사를 지워버리니
40년대 항일관련 교과서에서 별로 배울것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안타까운현실,,ㅠ
<광복70년> 중국 타이항산에서 키운 '조국 독립의 꿈'
송고시간 | 2015/07/27 07:00
조선의용군 순국선열 전적비(한단<중국>=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 산시성(山西省) 상우춘(上武村)에 있는 조선의용군 순국선열 전적비. 중국 화북지역 조선의용대(군)의 항일투쟁을 기리며 지난 2002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중국 지방정부가 함께 세웠다
..독립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는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1938년 10월 중국 정부의 임시수도인 허베이성(湖北省)의 한커우(漢口)에서 조직했다.
전투보다는 무장 선전에 주력한 의용대는 초기 병력이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1940년 초에는 300여 명까지 세를 불렸고, 중국의 항일 전쟁에 동참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들 중 일부가 1941년 봄 중국 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인 타이항산으로 향했다. 의용대 창설을 지원한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갈등이 커진 이유도 있었지만 만주와 한반도까지 진격해 조국을 되찾자는 게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
이름 없는 조선의용대원의 묘(한단<중국>=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 산시성(山西省) 상우춘(上武村)에 있는 조선의용대 무명용사의 묘. 항일투쟁 당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무명용사의 묘는 2006년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번듯한 묘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수십 년간 방치됐다. 201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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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풀만 무성한 옛 절터 앞에는 지난 2002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중국 지방정부가 함께 세운 '조선의용군 순국선열 전적비'가 쓸쓸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절터 뒤편으로 산길을 150m가량 올라가면 이름 없는 조선의용대원의 묘가 나온다. 2006년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번듯한 묘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수십 년간 방치된 무덤이었다.
상우춘에 머무는 기간 조선의용대는 후자좡(胡家庄) 전투를 비롯한 격전을 치르며 많은 대원을 잃었다. 이 묘소의 주인공도 당시 전투로 희생된 대원 중 하나로 추정될 뿐 이름조차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추모제를 올리며 조국을 위해 타국에서 목숨을 마친 의용대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
중국에서 만난 70여 년 전 한글 구호(한단<중국>=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터우디춘(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의용대의 한글 구호. 1940년대초 화북지역의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옛 묘소(한단<중국>=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스원춘(石問村)에 있는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옛 묘소. 1942년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두 열사는 이 곳에 안장됐다 1950년 한단시에 있는 국립묘소인 진지루위(晉冀魯豫) 열사릉원으로 이장됐다.
◇ 일본군의 총탄에 사그라진 '북진의 꿈'
윈터우디춘에 머문 시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큰 상처를 입었다. 1942년 5월부터 두 달 동안 일본군은 4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타이항산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지휘관이었던 윤세주와 진광화를 비롯해 대원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윈터우디촌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스원춘(石問村)은 윤세주와 진광화 열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이다.
두 열사의 묘소는 이곳에 있다 1950년 한단시에 국립묘소인 진지루위(晉冀魯豫) 열사릉원이 건립되면서 능원으로 이장됐다.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옛 묘소는 연꽃을 닮은 연화산을 뒤로하고, 지금은 말라버린 청장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풍수의 문외한이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명당이었다.
묘를 관리하는 마을 주민 리슈잉(李秀英·50) 씨는 "두 열사가 묻히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본 시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조선의용대가 좋은 묏자리를 찾아서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두 열사의 묘 사이에는 지린성(吉林省) 출신 조선의용대원의 유해가 묻혀 있다. 관건이라는 이름의 이 의용대원은 1984년 세상을 뜰 때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됐다.
관건의 사연은 당시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중국 내에서 조선의용대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