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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가 세운 동상
1939년 12월 7일 오전 11시 옌지(연길) 서(西)공원에서는 큰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만주국과 일제 주요 인사, 친일 인사 등 수천 명이 참가한 이 행사는 한 사람의 동상과 기념비 제막식을 위해 모여 있었다. 당시 신문에는 이 행사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주국 치안 숙청의 공로자이요, 동아 신질서 건설의 공로자인 고 관동군 촉탁 겸 협화회 중앙본부 촉탁 김동한 씨의 영구불멸의 위대한 공적을 영원히 기념할 김동한 동상과 간도협조회 기념비는 (…중략…) 위대한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하사품 전달식을 이소 옌지 헌병대장으로부터 거행한 다음(…후략…).”
-<만선일보> 1939년 12월 10일 자 ‘고 김동한 씨 동상 제막식 성대 거행, 만선 대표 수천 명 참렬’
정리하자면 김동한이라는 사람의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는 행사가 열렸고, 일본 헌병대장이 하사품을 전달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기사에는 기념사업회 등이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 김동한에 대한 기념사업회도 있는 듯 했다.
▲ 연극 <김동한> 공연 모습./<만선일보> 1940년 2월 11일 자 조간 2면 |
일제강점기 전후로 한반도와 만주에 숱한 친일파들이 있었지만, 일제가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우대받은 사람을 찾기는 극히 힘들다. 이 뿐만 아니었다. 일제는 김동한에 대한 희곡을 공모해 김영팔(혹은 김우석)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고, 그 희곡으로 연극 <김동한>을 제작했다. 이 연극은 1940년 2월 11일 일본의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해 만주국 수도 신징의 협화회관에서 대규모로 상연됐다.
2. 변신의 귀재
김동한은 1892년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하서리 3번지에서 태어난다. 평양대성중학교를 나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 고향 선배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동휘를 따라 간도로 이주했다. 1911년 4월 러시아 장교 육성학교인 하바로프스크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며 1913년 4월 이르쿠츠크사관학교에 입학해서 1916년 3월 졸업했다. 1916년 러시아 군 이르쿠츠크 보병 제27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벨라루스 민스크지역에서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백군(러시아 혁명 반대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 트로츠키의 신임을 받아 그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가운데 선두에 나섰다.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 고려여단 검사단 위원, 적위군 조선혁명군 장교단 연대장을 역임했다. 1921년 5월 4일 소련에서 열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공동의장에 추대되면서 조선인 공산주의자 가운데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1922년 6월 20일 그는 반유대주의 운동에 참가한 죄로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석방된 1923년, 중국 군벌 수장 오패부 휘하로 들어간다. 오패부 휘하에서 그는 중소변경지구(중국-소련국경지역) 제1육군사령관으로 활약한다. 1924년 연해주에서 소련 당국에게 일본인 밀정 혐의로 체포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어떤 경위로 체포되었고, 소련은 왜 일본에게 넘겼고, 일본은 왜 조선으로 데리고 와 그를 풀어줬는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잡한 당시 정세 속에서 그 역시 위태로운 줄타기를 거듭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1910~20년대 그가 걸어온 길을 정리하면, 초기에는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자 러시아군에 투신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에 투신했고, 다시 중국 군벌 휘하에 있다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김동한은 수완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6년 4월 1일 자 에 실린 기사에서 그는 “정치적 수완가 김동한 씨”로 소개됐고, 만주국 삼림경찰대장 이응범도 그를 “만주 넓은 뜰에서 발 넓게 활동하던 정치적 수완가”로 표현했다. 그는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정통하고, 일본어도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 1936년 4월 1일 자에 실린 김동한 사진과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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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1925년 조선에 들어온 후 ‘극렬 친일’로 마지막 변신을 했다.
3. “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해 허수아비 만주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시작했다.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후방기지로 건설하고자 했다. 특히 만주 동부지역에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는 항일 조선인 세력, 중국공산당 세력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오랜 시간 만주지역 주민들과 항일세력은 긴밀한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고, 일제는 이들의 연대를 깨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제는 1932년 8월 7일 항일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소위 ‘해란강 대학살 사건’을 일으켜 주민 수천 명을 살해했다. 더 나아가 1933년 11월 하순부터 이듬해 봄 까지 2차 학살을 자행했으나 만주 주민의 원한을 사 항일유격대는 오히려 세를 불렸다. 특히 중국인과 조선인은 일제를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고 함께 조직을 건설하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결국 일제는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항일세력 간 내분을 일으켜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가 선택한 사람이 김동한이다.
“항일세력 수천 명 투항시켜”
김동한은 조선인 출신으로 러시아, 중국어도 잘할 뿐 아니라 과거 화려한 이력으로 폭넓은 인맥과 뛰어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일제에 대한 충성심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는 공공연히 “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고 말했다.
1934년 9월 6일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연길헌병대장 가토 중좌와 연길독립수비대장 다카모리 중좌는 김동한을 내세워 간도협조회를 창설했다. 간도협조회는 겉으로는 “아시아주의 정신을 배양하여 만주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천명하고, 만주국에 협조하는 조직으로 위장했다. 일제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간도협조회는 김동한의 수완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설립 1개월 만에 회원 수가 1000명을 넘어섰고, 1년 뒤인 1935년에는 6411명으로 늘어났다. 간도협조회장은 김동한이며, 대부분의 간부들은 항일운동 경력이 있거나 공산주의 활동 전력이 있는 조선인이었다. 변절자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간도협조회는 산하에 특별공작대와 의용자위단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항일세력 내에 침투해 내분을 일으키거나 때에 따라서는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해 항일세력을 분쇄하는 집단이다.
▲ 항일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 동태를 감시한 밀정의 보고서 |
“민생단 사건으로 일제에 큰 도움 줘”
민생단 사건으로 항일세력이 내분에 휩싸이는 것을 본 김동한은 이를 더욱 부추기고자 온갖 공작을 벌였다. 예를 들어 김동한은 중국공산당 왕천현 서기인 송일에게 편지를 남겨 “전번에 이야기한 유격구에 관한 비밀조사보고는 새로 파견한 공작원과 면담하기 바란다”고 적었다. 이 편지를 고의로 중국인에게 발견되도록 하였다. 이를 본 중국공산당은 바로 송일을 총살했다.
4. 김동한의 후예, 간도특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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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한 연표>
-1892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
-단천공립보통학교, 평양 대성중학교 졸업.
-1910년 이동휘 등과 함께 간도로 이주.
-1911년 4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육군유년학교 입학.
-1913년 4월 이르쿠츠크 사관학교 입학.
-1916년 러시아군 이르쿠츠크 보병 제 27연대 소위 임관. 1차 세계대전 참전.
-1917년 공산당 입당.
-1921년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 고려혁명군 장교단장.
-1922년 6월 20일 반유대주의 운동 참가 이유로 제명. 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 일시 수감.
-1923년 중국 군벌 오패부 산하에서 소만국경 사령관을 지냄.
-1924년 12월 6일 친일밀정혐의 및 중국인 밀정과의 내통 혐의로 소련군에 체포.
-1925년 8월 일본영사관에 인도, 고향으로 귀향.
-1925~1930년경 함경남도에서 건설업과 사회활동을 함.
-1930년경 만주로 감.
-1931년 민생단 조직에 잠시 참여.
-1934년 9월 6일 간도협조회 조직. 회장.
-1935년 관동군 헌병대사령부 북지 파견공작반 반장.
-1936년 6월 만주국 협화회 동변도 특별공작부 부장.
-1937년 1월 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지도부 촉탁.
-1937년 12월 7일 흑룡강성 이란현 인근에서 김근의 매복에 걸려 사망.
-1939년 12월 일제 주도로 옌지에 동상 및 기념비 건립.
-1945년 일제 패망 후 동상 및 기념비 파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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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 요약
본래는 항일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자유시참변을 비롯해 여러번 내분을 겪어가면서 총독부에 투항. 전향 선언.
2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일제 총독부의 밀정노릇하면서 지내고, 30년대 무렵에는 만주에서 관동군 특무대 소속으로 지내면서 만주에서 항일 조선인들 때려잡는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함.
1937년에 동북항일연군하고 교전 중 전사.
죽은 이후 일제 총독부에서 야스쿠니 신사 안장을 비롯해 만주에 그를 기리는 동상건립해주는등 깍듯이 예우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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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속에 나오는 염석진의 삶과 실제 가장 흡사한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