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한중록과 대천록기록을 중심으로 주장되어오던 설이긴 한데,
한중록이 혜경궁 홍씨가 본인의 친가인 홍씨집안을 정치적으로 변호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측면이 있고,
대천록은 민간기록이라는 점 때문에 그 설의 신빙성이 비판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실록과 사도세자 묘지문을 중심으로 이 설을 지지해보고자 합니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대행 대왕께서 인자하게 덮어 주시는 덕이 그처럼 진지하고도 간절하셨기 때문에 선친(先親)의 지난날의 질병이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정상으로 회복될 수도 있었는데, 흉계를 빚어 온 지가 이미 오래이고 의구심이 쌓여 온 것이 점차 고치기가 어려웠으니, 그 때에는 단지 문침만 제때에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선도 제때에 하지 못하였다.
성인(聖人)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방종을 자행했다가 이윤(伊尹)에게 추출되었던 태갑(太甲)을 배우며 욕심과 방종을 일삼으니, 계도(啓導)하려고 하였지만 마침내 제멋대로 소인배들과 어울리니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하였다. 중국 고대 은(殷)의 성탕(成湯) 손자 태갑은 무도(無道)하여 신하인 이윤에게 동(桐)땅으로 추방을 당했다가 허물을 고친 후에 다시 복위되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그렇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였다.
영조는 묘지석에서 예부터 무도(無道)한 인군(人君)은 많았지만, 세자(世子) 때에 이와 같이 무도(無道)한 경우를 듣지 못했다고 탄식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한 만고(萬古)에 없던 일을 나이 들어 흰 머리가 된 아비에게 행하게 하였다고 통곡하였다. 그리고 뒤주 속에 죽게 된 잘못은 교도(敎導)를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인 자신에게 있다고 하였다.
아!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 만, 세자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이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특히 사도세자 묘지문을 보면, 어쩔수 없이 아들을 죽이기에 이르른 세자의 광증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영조 스스로가 세자의 광증과 살인에 대해 언급했고, 정조 또한 세자의 병에 대해 실록에서 인정했습니다.
승정원일기의 상당부분을 세초하긴 했으나 ( 거기에 어떤 기록이 있는지 알길은 없으나, 그 내용이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인 내용이 아닌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한 기록을 다 지우지는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