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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백제 오사카...
게시물ID : history_222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ckk
추천 : 2/4
조회수 : 161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7/30 22: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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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사카가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의 근거지였으니..역사의 아이러니..라는 생각듭니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729030556316

험한 파도 헤치고 도착한 곳.. 백제 부흥의 꿈 서린 오사카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0>또 하나의 백제 오사카
...
오히려 일본에서 백제 문화의 흔적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문화는 발상지보다 변두리에서 잘 보존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백제 흔적은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어로 ‘구다라나이(百濟無い)’라는 말은 ‘백제가 없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백제 물건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일본 문화에 스며든 백제의 영향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말까지 만들어졌을까.

일본 오사카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에서 백제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할 당시 본토로 들어가는 첫 관문 역할을 했으며 광복 이후에도 한국 교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다.
오사카 시 남쪽 히가시스미요시 구에는 ① 백제대교 ② 백제 표지판 ③ 백제시계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 ④ 오사카 시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사카이 시 료난 마을에 가면 ‘백제촌’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동종(銅鐘)도 볼 수 있다. 오사카·사카이=정위용 기자 [email protected]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大阪)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제일 먼저 닿은 항구였다. 오사카 항구의 옛 지명은 ‘나니와쓰(難波津)’인데 ‘험난 파도를 헤치고 당도한 항구’라는 뜻이다. 주어는 바로 도래인들이었다. 규슈(九州)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라는 내해를 거치면 바로 오사카 항에 닿는다. 고대 이 코스로 들어간 이들 중 백제인들은 압도적이었다. 백제의 또 다른 얼굴 오사카로 떠나보자.

○ 백제천 백제종 백제탕

5월 21일 ‘百濟川(백제천)’이라는 강 이름이 있는 오사카 남쪽, 사카이 시로 향했다. 닌토쿠(仁德) 왕릉을 비롯한 대규모 능과 스에키 토기 유적지, 철기 유적지 등이 지금도 잘 보존된 곳이다.

오사카가 인구 200만 이상의 대도시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잿더미 위에 도시를 확장했던 1960년대 이후다. 오사카가 시내 중심으로 급변하는 동안 주변 도시 개발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그러다 보니 옛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날 취재에는 오시종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오사카 부 사카이 시 지단장이 동행했다. 70세가 넘는 재일교포였는데 ‘밥’ ‘이름’ 등 몇 가지 빼고는 한국어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백제천(구다라가와)’을 소개하면서 난데없이 “이제는 일본인들이 옛날처럼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식민 통치를 시작하면서 오사카 일대 한반도 관련 지명 대부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사카이 시 남쪽 주택가 료난 마을 약간 비스듬한 언덕길에는 ‘百濟村(백제촌)’이라는 이름의 동종(銅鐘)이 있었다. 양각으로 새겨진 한자가 매우 선명했다. 오 단장은 “언제 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주민들이 매우 아끼는 유물”이라고 했다. 동종 옆에는 ‘百濟湯(백제탕)’이라고 적힌 약수터가 있었다.

중세 시대 오사카 주변에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얼마나 살고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단서는 815년 만들어진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당시 이즈미(和泉) 가와치(河內) 등 5개국 성씨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왜는 당시 율령제 반포에 따라 전국을 66개국으로 나누었는데, 가와치와 이즈미는 수도권에 해당하는 기나이(畿內)에 속해 있었다. 이 중 이즈미는 지금의 사카이 시를 아우르고 있었다.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기나이 5개국에서 한반도 출신 도래계 씨족이 36%를 차지했다”는 연구 자료가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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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전역으로 퍼진 도래인들

마을 주변에는 백제인들의 집단거주를 증명이라도 하듯 대형 무덤만도 10곳이 넘었다. 여기서 나온 유물들은 백제가 직접 전해줬거나 백제의 기술이 응용된 철제 갑옷과 병기, 스에키 토기나 철제 농기구와 같은 생활용품들까지 다양하다. 미나미 미쓰히로(南光弘) 동오사카 문화재학회장은 “일본 전역에 절과 신사가 급격히 늘어난 7세기 후반 시점이 백제 멸망 이후 시점과 비슷하다는 점을 보면, 나라가 망한 후 백제인들이 일단 지금의 오사카 나라 지역에 집단 거주하다 이후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0세기에 이르러서는 일본 북동부에까지 퍼진 것으로 보인다. 미나미 회장은 “당시 일본에는 금 공예품이 없었는데 도호쿠(東北) 지역에서 금동 불상이 발굴됐다”며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유품”이라고 했다.

도래인들이 일본 각지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추적하기 어려운 반면 왕족과 귀족들의 이주 기록과 경로는 유물 발굴로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오사카 나니와 궁터에서는 ‘百濟’라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가 발굴됐고 나무에다 붓글씨를 쓴 목간(木簡)이 발견됐는데 비구니가 살던 절에 그의 아버지가 면회 허가를 얻기 위해 찾아간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목간에는 백제의 5부제를 본뜬 주소지가 나온다. 오사카역사박물관의 데라이 마코토(寺井誠) 주임학예원은 “오사카와 인근에 잔류하던 왕족과 호족들은 행정구역도 백제 방식으로 정하는 등 고향 백제와 똑같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출처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729030556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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