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가 가기 직전, 신의군을 주축으로 한 삼별초가 점령된 동계로 향합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 세력에게 가서 몽고말을 쓰며 몽고의 사신인 것처럼 행사하죠.
"너희들의 활과 칼을 끌러서 한 곳에 두고 모두 원수의 명령을 들으라. 고려 태자가 장차 들어가 조회하여 하는데, 너희들은 어째서 고려 사자 기성을 죽이고 나라에서 보낸 선물을 빼앗았는가.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 말을 들은 반민들은 땅에 엎드려 떨었고, 그 틈을 타서 학살을 벌인 후 예전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들에게 잡혀 죽은 김기성의 의복과 공물을 되찾아 옵니다.
분명 동계의 반란은 고려에 큰 피해를 주었고, 이들이 매국노라는 사실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욕 할 자격이 고려 조정에 있을까요? 신의군은 몽고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그런만큼 몽고에 대한 적대감은 가장 강했을 것입니다.
뭐 항복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이안사만 해도 미리 항복했지만 최소한 고려에 대한 적대행위는 하지 않았죠) 동진군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들쑤신대다 사신을 붙잡아 죽인 건 욕 해 마땅한 일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왠지 서북청년단이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1. 전쟁의 끝 태자가 떠난 강화도, 자운사의 연못에 피와 같은 붉은 물거품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왕이 죽을 징조라는 거였죠. 이 때 고종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수 등 대신의 집에 거처를 옮겨다녔죠.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때였기에 환도한다든가 전후 복구를 한다든가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직 몽고군도 완전히 떠나지 않은 시점이었죠.
그런 가운데서도 태자는 자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장마가 시작됐는지 강 물이 불었는데도 억지로 건너서 동경(요양)에 이릅니다. 여기서 "내일 대병이 고려로 향할 것이다"는 말을 듣고 급히 원수 여수달과 송길대왕에게 선물을 주며 공격을 막습니다. 왕이 아직 안 나왔다고 따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 하죠.
"대왕이 일찍이 말하기를, '태자가 들어와 조회하면 군사를 파한다.' 하셨기 때문에 지금 내가 온 것인데, 만일 군사를 파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두려워서 도망하여 숨을 것이니, 뒤에 아무리 잘 타이른다 하더라고 누가 다시 듣고 따르겠으며, 대왕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납득했고, 대신 강화도의 성을 허무는 것에 합의합니다. 파견된 이들이 주자와 도고인데, 그들이 너무 독촉해서 군사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 해 울면서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만일 이럴 줄 알았으면 당초에 성을 쌓지 않았던 것이 나을 뻔했다"
최씨 정권의 행동은 기분이 나쁘지만, 어찌됐든 고려 항쟁의 상징이자 임시라 해도 고려의 도성이었는데 그걸 외국군의 강요에 허물게 된 것이죠. 강화도 내의 여자와 아이들도 모두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외성까지 허물고 돌아갑니다. 빨리 육지로 돌아오라는 강요였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고종은 유경의 집에서 죽습니다. 향년 68세. 나름 오래 살긴 했습니다만 최씨 정권이 끝난 지 1년만에 죽은 것이죠.
그를 좋은 왕이라 하기는 힘듭니다. 아니 애초에 좋은 왕이었으면 그 자리에 그렇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겠죠. 그래서인지 후대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고 (애초에 왕은 좋게 좋게 얘기해야 되고, 무신에 대한 반감이 더 큰 원인이겠지만) 지금 봐도 밉다기보다는 불쌍하다는 마음이 많이 드네요. 최씨 정권은 그를 억압하던 것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게 끝나는 순간, 그 역시 더 살아갈 기운을 잃었을지도요. 임용한 교수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정말로 이상한 것이 중압과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고, 내 삶에 파고든 가시와 같다고들 말 하지만, 정작 그 가시를 뽑아내면 생명도 함께 꺼지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고종은 마지막에 자기가 반드시 해야 될, 하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 잘 한 일을 합니다. 당시 김인준은 태자가 없으니 그 동생인 안경공 왕창을 왕으로 옹립하려 합니다.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반대를 얻은데다 고종의 유서가 나와 버렸죠.
"지금 사왕은 사신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 사이의 군국의 서무는 태손에게 듣게 하라"
이런 것까지 나와 버렸으니 새로운 허수아비 왕을 세우려던 김인준도 포기할 수 밖에요. 여기서부터 무신정권의 끝을 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몽고군은 본격적으로 철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도 약탈은 여전해서 그들이 완전히 돌아갈 때까지 백성들을 그대로 섬에 두자는 논의가 많았죠. 수확이 코 앞이었으니 마지막까지 한 몫 단단히 잡고 싶었나 봅니다.
태손 왕심, 후의 충렬왕은 3일만에 상복을 벗습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때가 아니었고, 몽고 사신도 상복을 입고 맞을 수 없는 형편이었죠. 태손이라 해서 어릴 것 같지만 이 때 그의 나이 24, 충분히 정치를 할 나이였죠. 하지만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었고, 그 앞에 놓인 상황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습니다. 거기다 문제는 오랜 전쟁으로 인재풀이 말라 버렸다는 것이죠. 오죽했으면 별자리를 볼 수 있다고 태학박사(천문을 보고 점을 치는 직책)에 임명하고, 호랑이를 맨 손으로 잡았다고 뜬금없이 어의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_-;
+) 그리고 김인준 등 집권한 이들은 태손이 상복을 벗었다는 핑계로 자기들도 상복을 벗고 강에서 뱃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_-;;;;;;;;;;;
기근은 계속됐고, 그런 가운데서도 관리의 부패는 끝이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한 발 벗어난 제주도의 경우 부사가 착취를 계속해 나득황으로 바꾸니 그보다 더 심하게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하죠. 이는 후에 삼별초가 제주도에 기반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뭐 후에 김지득으로 바꾸면서 나아졌습니다만.
반란도 계속돼서 안북부(안주)에서 부사 문수를 죽이고 몽고에 붙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외에도 반란이 계속 일어났는데, 조정에서는 몽고가 두려워 이들을 막지도 못 했다고 합니다. 다만 약탈하러 들어온 몽고군을 몰래 군사를 보내 쳐서 내쫓은 경우는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몽고 사신들의 강요에 의해 개경으로의 환도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새로 궁궐을 짓는 일에 투입된 이가 바로 김방경이죠. 여기에 김인준의 동생 김승준도 있었구요.
1260년 3월, 태자가 돌아오면서 태손의 대리 청정은 끝납니다. 이렇게 원종 순효대왕, 충경왕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겨우 끝난 전쟁, 겨우 세가 꺾인 무신정권, 이제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2. 칸과 왕의 만남 한편, 몽고 내에서도 고려를 참소하는 것은 계속됐습니다. 선두는 역시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 -_- 그는 고려가 진심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고 참소했고, 당시 몽고에 있던 이세재가 겨우 막아냈죠. 태자는 이들과도 맞서 싸우며 고려의 생존을 약속받아야 했습니다.
당장 몽고에 가자마자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1259년 9월에 몽케 칸이 죽은 것이죠. 남송을 치러 갔던 그는 사천(촉 -_-a) 지역에서 병에 걸려 죽습니다. 전사했다는 설도 있구요. 원종이 항복해야 될 대상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러 사천성으로 향하던 태자는 하릴 없이 돌아와야 했습니다. 헌데 이 때도 일화 하나를 남기죠.
동관(섬서성 동관현)을 지나던 그는 화청궁을 지나게 됩니다. 여기는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데리고 놀았다는 곳, 거기 있는 온천에서 목욕할 것을 권유하는 장수에게 태자는 이렇게 말 합니다.
"이곳은 당 명황(唐明皇)이 목욕했던 곳이니, 비록 시대가 다르다 하더라도 신하로서 어찌 감히 더럽히겠는가?"
멀어도 한참 먼 황제에 대해 진심으로 얘기했겠습니까. 우리는 이 정도로 황제를 섬긴다는, 충성 서약이었죠. 몽고인들이 감동한 것은 말 할 필요 없겠죠.
당시 몽케 칸의 동생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아리발가)는 다음 칸의 지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아릭 부케가 막내인 이상 그가 더 유리했고, 기존의 몽고 땅 등 북쪽의 땅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쿠빌라이가 이를 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쿠빌라이는 강남 악주(호북성)에서 작전 중에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야 되는 상황이었죠.
이걸 알게 된 건지, 운이 좋았는지, 태자는 그에게 접근합니다. 북경으로 올라오는 길에 직접 폐백을 받들어 쿠빌라이를 맞이하니, 그는 놀라고 기뻐하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이다. 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어도 항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단지 말로만 하는 공치사가 아니었습니다. 20년 넘는 전쟁 속에서도 몽고의 세력권에 편입되는 걸 거부한 고려입니다. 그런 나라의 태자가 자기에게 왔다는 것의 의미는 컸죠. 거기다 주로 고려 방면의 전쟁에 투입된 동방 3왕가 역시 이 덕분에 쿠빌라이 편을 들게 됩니다. 양 쪽의 정치적인 입장이 완벽히 들어맞았던 것이죠.
이 때에 둘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뒤의 일들을 보면 짐작 가능하죠. 항복하는 상황이 문제일 뿐, 이는 한국 외교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긴 합니다. 그 때문인지 원종은 태조 왕건, 성종, 현종, 공민왕 등과 함께 조선에서 대접 받는 고려왕 중 한 명이 되었죠.
그렇게 그는 고려의 생존을 약속받습니다. 이 때 홍다구는 한 번 더 고려를 참소하지만 태자가 나서서 막아서 흐지부지되었죠.
어찌됐든 고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릭 부케와의 전면전이었습니다. 태자는 한동안 잊혀져서 몽고에 머물러 있어야 했죠. 이에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에게 이렇게 진언합니다.
"고려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산을 의지하고 바다로 막히어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한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태자 전이 와서 조회할 때에 마침 황제께서 서쪽을 정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2년 동안을 머물러 있었으나 공궤와 시설이 허술하여서 호의를 사지 못하였으니, 일단 돌아가면 장차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사관과 음식물을 후하게 하여 번왕의 예로 대접하소서. 이제 들으니 그 부친이 이미 죽었다 합니다. 전을 왕으로 세워 귀국시킨다면 세자도 반드시 은혜에 감사하고 덕을 받들어 신하의 직분을 닦기를 원할 것이니, 이것은 군사 하나도 수고롭히지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쿠빌라이는 옳게 여기고 제대로 대우한 다음 속리대와 강화상(진주 사람인데 포로가 돼서 몽고인이 됨)에게 그를 호위하여 고려로 돌려보냅니다.
때는 1260년 3월, 쿠빌라이는 칸이 되었으며, 태자는 고려로 돌아가 왕이 됩니다. 둘의 거래는 끝났고, 이제 그 내용을 이행해야 했죠.
+) 쿠빌라이가 아릭 부케를 완전히 평정한 것은 7월이었습니다.
3. 밀당의 시작 태자는 속리대와 함께 왔지만, 역시 개경으로의 환도는 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속리대는 돌아가겠다며 까칠하게 나섰고, 태손 왕심이 속리대에게 찾아가 선물을 준 후에야 겨우 마음을 풀었습니다.
우린 니네 충분히 예우해 준다,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라. 쿠빌라이 칸의 밀당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원종으로서는 머리가 터질 듯 했을 겁니다. 무신정권의 잔당, 김인준 등은 환도를 거부했고, 몽고에서는 계속 강요했으니까요. 강화도로 같이 들어간 속리대와 강화상은 이렇게 압박을 주죠.
"대접하는 게 날마다 좋긴 한데요. 우리가 여기 온 건 섬에 있으면서 얻어 먹기만 하라는 게 아니거등여?"
원종은 각 관리들을 3개의 번으로 나누어 개경에 왕래하게 하면서 환도 준비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명시돼 있진 않지만 반발이 꽤나 컸을 겁니다. 그리고 원종이 가진 힘은 몽고밖에 없었습니다.
4월에는 쿠빌라이 칸이 직접 편지를 보냅니다. 연애편지겠습니까. 독촉장이었죠.
"지금 우리 땅 아닌 건 니네랑 송 뿐이거든? 근데 송도 이제 거의 망했어. 내가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진짜 괜찮은 애다 싶어서 살려주고 니네 땅도 돌려줬잖아? 그럼 약속 지켜야지. 니네 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났다고? 그럼 왜 그 내란 일으킨 놈이 왕 안 되고 니 아들 왕으로 세웠겠냐?"
"니네 백성들 고생 많다는데, 다 죽이는 건 내 본심이 아니다. 빨리 섬에서 나와 니네 백성들 어루만져야지. 나 헛소리 안 하는 거 알지? 좋은 말로 할 때 거기서 나와."
쿠빌라이 칸이 즉위한 것은 그 해 3월 20일, 일단 원종은 그에 맞춰 자기도 즉위합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런 협박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서경에 주둔하고 있던 나머지 병력도 귀환시킵니다. 거기다 김보정 등 붙잡아 뒀던 고려인 100명도 보내주죠. 난 니 편이다, 그러니 너도 빨리 약속을 지키라는 거였죠. 밀고 당기기는 계속됩니다.
"우리 변방 장수들이 편지 보내는 게 왜 이따위인 건데? 내가 다 민망하다. 니가 진짜 귀순한다 생각해서 책봉까지 해 줬으면 말 들어야 될 거 아냐? 농사 안 지을 거야? 내가 군사 보내면 농사 또 못 지을 거 아냐? 포로가 된 백성들 돌려보내줬잖아. 계속 이럴래?"
이런 편지를 보내면서 또 포로가 된 고려인 440여 호를 돌려보냅니다. 밀당 쩝니다요 -_-;
원종은 왕심을 태자로 책봉했고 (이 때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적진 않겠습니다) 농사가 바쁘니 자기가 왕 된 거 신경쓰지 말고 농사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래도 재건은 힘들었던데다 메뚜기까지 돌아다녔죠. 고려는 조금씩이나마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속리대가 빨리 환도하라고 협박하기도 했구요.
8월에는 영안공 왕희를 돌려보내면서 또 편지를 보냅니다.
"니네 풍속 다 고칠 필요는 없고, (다행이죠 -_-) 사신은 보내라는 것만 보내고, 환도하는 것은 굳이 빨리 할 필요는 없으니 힘 닿는데로 하고, 주둔하는 병사는 가을에 다 철수시킬게, 거기 있는 다루가치들도 모두 돌아오라고 했고, 우리한테 항복해 온 애들도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빨리 찾아서 돌려보낼게. 아~무 걱정 마. 내가 너 생각하는 거 알지? 내 생각 잘 알고 절대 의심하거나 무서워하지 마."
이는 이전보다 조금 풀어진 말임과 동시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원종 뒤에는 자기가 있다는 것이었죠.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란? 무신 정권의 잔당을 숙청하는 것이었죠. 다음 해에 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태자 왕심을 보냈을 때도 쿠빌라이 칸은 몽고군을 보내 귀환을 호위하기도 했습니다. 적에서 아군으로, 복종 대신 고려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준다는 것, 상황은 이렇게 완전히 달라집니다.
거기다 고려가 할 일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쿠빌라이가 꿈 꾸고 있던 것, 그 다음 목표는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