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와 초나라가 일전을 벌인 홍수 전투
송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속국인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발발한 전투인데
송나라는 초나라에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홍수를 사이에 두고 송나라 군대와 초나라 군대가 대치를 했을 때
전투에서 송나라에 승산이 없음을 간파한 공자 목이가
송양공에게 간언을 합니다.
"우리나라 무기는 초나라 보다 못하고 군사의 숫자도 초나라 보다 못하며
군대의 훈련과 질 역시 초나라 보다 못합니다. 차라리 정나라를 다시는
치지 않겠다 초나라에게 약조를 하고 상구로 돌아 가십시오
그리하면 초나라도 더이상 우리를 추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송양공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합니다.
"지난 날 제환공은 초나라를 쳐서 패업을 이루었소
제 환공의 패업을 계승하고자 하면서 어찌 초나라를 피할 수 있단 말이오
비록 우리가 초나라보다는 약하지만 인의가 있소.."
춘추시대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다시 주나라를 받들어 천하를 안정시킨 자가 나타났으니
이를 곧 패자라 하였습니다.
제환공은 첫번째 패자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짖밟고, 하극상과 전쟁이 끊임이 없던 세상에
회맹이란 방식으로 다시금 질서와 평화를 가져오게 했죠.
송양공은 어려서 영명하다는 평가를 받은 군주로
어려서 신동으로 영명함을 알렸고
군주로써 병법과 예학에 밝다는 칭송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이 굶주릴 댄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구제하였고
신하를 대 할 때에는 예와 인의로 대하였기에
송나라를 안정시키고, 약소국임에도 존경을 얻은 명군이었습니다
일찍히 한번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킨 자는 송양공이 유일하단 평을 얻었던 모범적인 군주죠
때문에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은
송양공에게 그의 후계자를 부탁하였고
송양공은 약속 지켜 제나라의 후계를 안정시키는 성공하여
공정함과 신뢰로 다시금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제환공이 사망하고 다시 천하가 흔들리게 되었을 때
아무도 천하의 질서를 염려하거나 국력을 소모하며 나서는 이가 없었지만
송양공만은 나서서 질서를 바로 잡고자 분투했습니다.
천하에 주나라 왕이고 있고
제후국에는 공, 후, 백, 남, 자의 질서가 있건만
자작에 불과한 초나라는 강대한 힘을 믿고 스스로 왕을 칭하는
하극상의 대표적인 국가였습니다.
초성왕의 손자 초장왕은 감히 주나라 왕에게 참람하게도
"구정의 무게가 어찌되는가?" 물었으니
이는 주나라 왕권의 상징인 '구정'을 초나라로 옮기겠다는 것이며
주나라를 대신해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역심의 발현입니다.
정나라 왕은 주나라의 가장 근친으로 주왕실을 도운 공로를 인정 받아
주나라로 부터 은혜를 받아 그 지위가 공작에 이르렀음에도
주나라에 입조하지 않고 자작에 불과한 초나라에 입조하였으니
공위의 나라가 왕을 배반하고 자작위의 나라에 굴복하는
군신간의 신뢰를 배신한 것이었으며
제환공의 회맹으로 다시 주나라에 입조하겠다 약조 하였음에도
제환공이 죽자 배반하여 초나라에 입조했으니
국가간의 신뢰 역시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송양공은 지위가 공작으로 제환공의 후계를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제환공 이후 다시금 혼란해 진 질서를 바로잡겠다 맹세한 만큼
송양공은 의리를 아는 군주로써 그 신뢰를 지키고자 정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어찌보면 무모한 행동일 수 있는 공격으로
당연히 초성왕은 송나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초나라는 남방의 강대국으로
일찍히 패자 제환공 조차 여러 국가와 회맹하여
대항하여 간신히 이겨낸 강국 초나라이기에
홍수에서 대치한 약소국 송나라의 군대가
강군으로 이름 난 초나라를 이길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공자 목이는 이것을 알기에 사실상 항복을 하고 도망가자 건의했던 것이죠
홍수전투에서 송양공은
흔히 초나라가 강을 건 널 때 이를 공격하지 않아 패했다 전해 지지만
병장기, 군사의 수, 군사의 훈련도 모두 뒤쳐진 송나라의 군대가
뭘 하든 이길 가망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실리로만 따지자면 애초 정나라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고
군대를 보전하고자 했다면 목이의 건의를 받아 항복하고 후퇴했을 지언정
거기에 더하여 비겁한 수까지 써가며 패배하게 되는
치욕에 치욕을 더하는 악수를 두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왕실의 은혜를 입은 공위의 국가인 정나라의 배반을 용서하는 것은
곧 하극상의 나라인 초나라를 인정하는 것이고
초나라를 인정하는 것은 곧 천하의 질서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송나라가 초나라에 상대가 되지 못 할 지언정
마지막 남은 인의라는 명분조차 버린다면
그저 그런 약소국에 불과한 송나라 군주가 되었겠죠.
그렇게 송양공은 초나라에게 대패하였고
부상을 입은 채 귀국하였습니다
진나라의 공자 중이가 후계다툼에 밀려 유랑할 때
인의를 저버린 많은 나라가 진나라 공자 중이를 외면했지만
송양공만 유일하게 주나라 예법을 준수하여
망명한 진나라 공자 중이를 왕공의 예우로 대접하였고
공자 중이는 진나라로 귀국하여 진나라 공작 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주왕실과 같은 희성 제후 중 가장 강력했던 진나라는 나라를 정비한 후
주왕실을 위협하며 북상한 초성왕을 성북에서 대패시키고
다시금 패자가되어 천하의 질서를 되찾으니 그가 진문공입니다.
송양공은 무너져 가는 춘추시대 막바지 혼란 속에서
마지막까지 천하의 질서를 지키고자 한
인의가 있는 군주로 명망을 얻을 자격이 충분했지만
춘추시대 송양공 그가 다스린 송나라는
국가가 태생적으로 명망을 얻을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주나라를 중심으로 주왕실의 일가 친척들 + 주나라 건국 공신들이
작위를 받아 세운 제후국들이 모인 춘추시대
송나라는 주나라가 멸망 시켰던 은나라 (상나라)의 후손을 봉작한 나라였고
상나라 유민들의 나라인 송나라는 백성들은
유태인 마냥 전국을 유랑하며 장사에 종사하여
장사치들 즉 상인商人이란 말을 남긴 다른 주나라 제후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나라입니다.
춘추시대 수많은 어리석음과 멍청함에 대한 고사에서 그 주인공은 항상 송나라 사람입니다
(나무 그루터기에서 토끼가 와서 죽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 일화)
(비올때 신발장수 아들, 맑을 때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하는 송나라 아낙 일화)
(벼가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모를 다 뽑아서 작물을 죽인 송나라 농부 일화)
(문신을 하고 머리를 미는 월나라에 모자를 팔러가는 송나라 상인 일화)
춘추시대 송나라 사람들이 실제 멍청했던게 아니라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송나라를 보았고 어리석음에 대한 사례에 대명사 처럼 활용했을 뿐이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망국의 유민이 세운 나라 송나라의 군주
송양공은 패자인 제나라의 후손을 보호하고
공백기에 강대국 초나라의 하극상에 유일하게 대항하며 희행을 자청했고
유일하게 예법을 준수하며 다음 패자의 진나라의 길을 닦아 주었음에도
춘추시대 다른 제후들은
상나라 후손 주제에 감히 천하의 질서를 논했음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담아
송양왕의 신의는 분수도 모르는 주제 넘는 행동으로
송양왕의 인의는 어리석고 멍청함의 대명사로
그렇게 송양지인의 고사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송양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송양공이 홍수에서 패하긴 했지만 어떤 군자는 매우 칭찬할 만하다고 했다.
당시 중원의 국가들이 예의가 없는 것을 가슴아파하면서 양공의 예의와 겸양의 정신을 칭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