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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년 코닥 필름 역사의 뒤안길로 ......
게시물ID : docu_22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5
조회수 : 181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8/22 20:12:46
사진 사업 접고 기업용 인쇄만
ㆍ미 법원 ‘파산보호 졸업’ 승인

1878년 미국 뉴욕의 은행원으로 일하던 조지 이스트먼(사진)은 휴가지 카리브해로 떠날 짐을 꾸리다 여행을 포기했다. 추억을 담을 사진기를 가져가려다 지친 것이다. 당시 습판 카메라는 삼각대, 암실용 텐트 등 장비를 갖춰야 쓸 수 있었다. 

편하게 사진을 찍고 싶었던 이스트먼은 이듬해 건판 사진술을 발명했고, 이는 이후 필름이 된다. 필름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 ‘코닥(Kodak)’이 탄생한 밑거름이다. 코닥은 125년 전인 1888년 상표등록과 동시에 필름을 끼워 쓰는 사진기를 세상에 내놨다. 값이 25달러(현재의 600달러 상당)였던 카메라는 버튼만 눌러 장면을 담는 사진의 개념을 처음 만들었다.

이후 코닥은 1900년 1달러짜리 카메라 ‘브라우니’를 내놓고 필름도 한 통당 15센트로 낮췄다. 1935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필름 ‘코다크롬’을 출시했고, 1963년 이용자가 직접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다 쓰면 빼서 갈아낄 수 있는 ‘인스타매틱’이 나오면서 사진을 취미로 찍는 세상이 왔다. 1975년 이미 코닥은 세계 첫 디지털카메라를 만들었다. 크기가 토스터기 정도로 1만화소에 흑백 사진을 찍는 시제품이었지만 약 40년 전에 현 ‘디카’의 초석을 만든 것이다.

의료용 사진과 동영상 카메라·필름, 비디오테이프, CD 등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기술에서 코닥은 절대 강자였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명성은 2000년대 들어 휘청이기 시작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옮겨가는 흐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윤은 줄고, 부채는 늘어갔다. 2003년부터 직원 4만7000명을 잘랐고, 필름·종이·화학제품 공장 13곳을 매각했다. 1930년부터 포함된 다우존스 30개 우량 종목에서 2004년 처음 제외됐고, 수십년간 이어온 올림픽 스폰서도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그만둬야 했다.

코닥은 2012년 미국 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이후 디지털카메라 생산을 중단하고 문서·이미징사업부도 영국 연기금에 매각했다. 어떻게든 파산을 막으려는 코닥은 법원에 최종 구조조정안을 제시했다. 41억달러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카메라·필름 판매, 사진 현상은 모두 접고 기업용 인쇄에만 전념키로 했다. 필름은 영화용만 생산해 명맥을 유지할 예정이라고 블룸버그통신이 20일(현지시간) 전했다. 사진을 대중과 밀접하게 만들어준 코닥에 소비자용 제품은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이다.

법원은 코닥의 이 조정안을 20일 승인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판결을 내린 앨런 그로퍼 판사는 “미국 기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였던 코닥의 몰락과 파산은 미국 경제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212245485&code=970201

디카가 많은 요즘 필름 많이 사용하진 않지만 코닥하면 필름의 대명사였었죠

영화필름으로도 유명했었는데 안탑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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