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깐 물러난 것일 뿐 1255년 초, 몽고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국경을 넘나들었습니다. 서쪽의 경우 북계고 서해도고 다 떨어진 상황이라서 승천부까지 몽고 기병이 왕래하는데도 막지 못 하고 그저 군사를 돌려달라고 빌 뿐이었죠. 동쪽의 경우 등주(함남 안변)에서 철령에서 몽고군을 섬멸하면서 한 숨 돌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항은 왕에게 잔치를 열게 했습니다. -_- 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죠.
한편 영녕공 왕준은 몽고군을 따라 돌아갑니다. 이 때 채취화라는 이가 "처자를 버리고 공을 따라 먼 외국에 간 것은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 함인데, 지금 털끝만큼도 나라에 이로움이 없으니, 반역한 신하와 다름이 없다"는 말을 하며 도망갔는데 왕준이 그를 죽였다고 합니다. 만약 고려가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았다면 몽케는 그를 고려왕으로 삼아 괴뢰정권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월에는 기근이 듭니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죠.
"해골이 들을 덮었고 포로가 된 백성들이 도망하여 서울로 오는 사람이 잇달아 끊이지 않았다. 도병마사가 날마다 쌀 한 되씩을 주어 구제하였으나, 죽는 사람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때에 모든 도의 삼세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였다"
잡세만 없앴을 뿐 세금을 받기는 했다는 거죠 -_- 동사강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때에 공산성에 들어갔던 백성들은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아서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가에서 죽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붙잡아 매고 가는 자까지 있었다."
차라대가 다시 돌아온 것은 9월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추수 시기를 노린 것이었죠.
2. 지옥은 계속 되고 5월에는 동진의 병력이 동계에 쳐들어왔고, 몽고군도 심심하면 소규모 병력을 보냅니다.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차라대는 그냥 한 번 쑥 훑고 지나간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조정에서는 그래도 끝났겠지라는 생각과 이대로 계엄을 풀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서 계염을 해제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기다렸다는 듯 몽고군은 쳐들어 옵니다. 어차피 그들을 막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차라대와 왕준은 곧 서경에 도착했고, 척후병은 개경까지 이르렀죠.
조정에서는 "사신을 아무리 후하게 접대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최린이 "사신이 오면 예로써 대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다른 방법이 있나요 뭐 -_-; 이 때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까지 부족해서 왕이 점심을 줄이려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 왕이 해당 업무를 맡는 좌창 별감 윤평(-.-a)을 불렀는데 오지 않았고, 그를 자르려 하다가 "잘라도 내일 복직될 건데 이게 뭔 징계냐"면서 허탈해 하기도 했죠. 고종이 한 것은 이번에도 중 300명을 불러 3일간 밥 먹이며 기도하게 한 것 뿐이었습니다.
이미 쑥대밭이 된 곳, 몽고군은 단 한달만에 충청도까지 휩쓸고 충주에 이릅니다. 하지만 차마 충주성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충주성을 우회해 대원령(하늘재로 추측하더군요)을 넘어 경상도로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충주성을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던 이유가 나와 버렸죠.
대원령을 넘던 차라대는 기습을 받아 1000여명이나 되는 피해를 입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때 그들은 공격한 것은 다이 철소 소속의 천민들이었던 것입니다. 다인 철소는 충주 지역에서 철 및 관련 수공업품을 생산했던 곳입니다. 충주성 전투 이후 천민들이 면천됐을 때도 그들은 되지 않았는데, 이 공으로 그들도 면천되고 다인 철소도 익안현으로 승격됩니다. 이쯤 되면 짜증나는 수준입니다. 일반 군사도 아니고 평민도 아닌 천민들에게 계속 막힌 것이니까요. 그냥 성 하나면 모르겠는데 경상도로 가려면 무조건 거쳐야 되는 최중요 거점이었죠. 경상도가 그나마 보전된 건 다 이 덕분이었습니다.
대신 그는 전라도를 노립니다. 또한 몽고와 고려간의 본격적인 해전이 이 때부터 시작됩니다. 12월, 전라도의 섬 중 하나일 듯한 조도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죠.
이전에 이미 전라도가 점령됐을지, 충주에서의 패전 이후에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진격은 참 빨랐습니다. 1256년이 올 무렵에는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배를 만들어 여러 섬들을 공격한 것으로 보이거든요. 강화도에서도 이 의미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몽고가 해군을 동원했다는 것, 그리고 전라도의 뱃길이 끊기면 자기들도 굶어죽는다는 것이니까요.
최항은 장군 이광과 송군비에게 수군 300을 보냅니다. 본격적인 해전이 시작된 것이죠. 그리고 전쟁의 양상도 크게 바뀝니다.
+) 2월에는 수은이 비처럼 내렸다고 합니다. 무섭네요
3. 마침내 그들이 나섰다 조정에서는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을 파견하는 것을 중지합니다. 그 이유를 보면 이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알만할 겁니다.
"그때에 사명을 띠고 나간 자가 백성의 재산을 긁어 무리하게 거두어 위에 바쳐 은총을 견고하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겨 도리어 몽고 군사가 오는 것을 기뻐하였다" -_-;
최항은 대장군 신집평을 차라대에게 보내는 한편, 마침내 도방의 병력을 전국에 파견합니다. 이 때 차라대와 왕준은 전남 담양에, 홍복원은 해양, 현 광주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안지대를 빼면 전라도가 석권된 것이었죠. 이제 몽고군이 섬을 공략해 강화도로 가는 물자를 끊을 수 있느냐 아니냐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이 때 파견된 병력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광과 송군비가 도착한 곳은 전남 영광이었습니다. 이 중 이광은 섬으로 들어가고 송군비는 정읍의 입암산성으로 갔죠. 성 내의 젊은 사람들은 이미 몽고에 투항한 상황, 그저 늙거나 어린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송군비는 계책을 꾸밉니다.
그는 약한 사람 몇 명을 성 밖으로 내보내 군량이 다 떨어진 걸로 오해하게 했고, 몽고군이 성 아래에 이르자 정예병을 이끌고 돌격해서 크게 승리합니다.
이런 식의 승리가 곳곳에서 시작됩니다. 서북면 병마사는 별초 3백 명을 보내 의주(서쪽 맨 위, 바로 그 의주일 겁니다)에 진 치고 있는 몽고군 1천 명을 쳤고, 대부도에 있던 별초는 인주(인천)에 상륙해 몽고병 백여명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다만 승리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충주도 순문사 한취는 아주(아산) 앞바다에서 배 9척으로 상륙해 몽고군을 치려 했다가 반격해서 전멸하기도 했습니다.
6월에는 장군 이천을 보내 수군 200명으로 상륙, 온수(충남 온양)에서 수십 급을 베었고, 사로잡힌 남녀 1백여 명을 구합니다.
차라대는 해양, 현 광주에서 악착같이 버티려 했지만 이런 공격에 시달리니 그냥 있을 수가 없게 되었죠. 그래서인지 화친 제의에 대한 답도 약간 달라졌죠.
"만일 화친을 하고자 한다면 어째서 너희 나라가 우리 군사를 많이 죽이는가. 죽은 자는 할 수 없지마는 사로잡힌 자는 돌려 보내라"
이렇게 말할 정도로 몽고군의 피해도 누적됐고, 때문에 고려에서는 사로잡은 몽고군 30명을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차라대가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요.
거기다 해당 지역에서의 항쟁도 계속됐습니다. 충주에서는 결국 성이 함락됩니다.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동안의 전투로 죽거나 부상당했고, 성까지 함락되며 남은 노약자들이 산성으로 옮겨 가서 싸웠죠. 몽고군은 산성까지도 공격합니다. 이에 버틸 수 없었던 그들은 월악산의 신사로 도망갑니다. 헌데, 이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죠.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지며 비바람과 우레, 우박이 몰아쳐 몽고군은 "신령의 도움이 있다"면서 두려워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충주는 끝내 패했지만, 결국 살아 남습니다.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차라대는 압해도를 공격했습니다. 헌데... 압해도가 어딥니까?
이 양반이 활동하던 곳입니다. 그 누구보다 전라도의 물길을 잘 알아는 뱃사람들이었으며, 어업이 안 될 경우 바로 해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이들이었죠. 몽고군은 군사 1천명과 전선 70척을 동원했지만, 이들은 직접 큰 배를 띄워 거기에 대포(투석기)를 설치합니다. (...)
차라대는 광주에서 직접 와서 보았지만, 그들이 만든 대포에 배들이 부서지는 게 보이자 포기해야 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공격해 보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대포를 설치해 놓고 기다리니 결국 만든 배를 불태운 채 후퇴합니다. 후방에서의 공격으로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회군합니다. 한편, 고려에서는 몽케에게 김수강이라는 자를 사신으로 보냅니다.
갑작스런 승전 분위기에 다들 놀라셨을 겁니다. 이건 무슨 벌집을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죠. -_-; 마침내 투입된 도방의 정예병과, 드디어 그 존재감을 나타낸 삼별초는 이렇게 맹활약을 펼칩니다. 그 모습은 정말 정예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죠. 이 경험은 그대로 축적돼 후에 삼별초의 활약에 보탬이 됩니다.
문제는 이게 너무나도 늦었다는 것이겠죠. 몽고가 제대로 해군을 동원해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으려 할 때에 가서야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3차 침공에서라도 이랬다면 어땠을까요?